의사가 의사를 고소…"아기 태어나자마자 뇌성마비"
2025-09-1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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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의사를 고소하다: 의료계의 반란
뇌성마비 신생아 사건, 숨겨진 의료 현장의 진실
분당서울대병원 산부인과 교수와 전공의가 분만 과정에서 과실 혐의로 기소되자 의료계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불가항력적 의료사고까지 형사적 책임을 묻는다면 필수 진료 기피 현상이 더 심해지고, 결국 피해는 환자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고소를 제기한 산모가 같은 병원 의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환자단체에서는 “의사조차 법적 대응을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의사가 의사를 상대로 한 고소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17일 서울 영등포구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18년 발생한 신생아 뇌성마비 사건과 관련된 민사 재판 판결문을 공개하며 입장을 밝혔다. 지난 5월 서울중앙지법 민사15부는 당시 산모이자 분당서울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전임의였던 A씨가 병원과 산부인과 교수, 전공의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총 24억여 원이 청구된 가운데 6억5000만 원가량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A씨는 2018년 4월부터 해당 병원에서 정기 진료를 받으며 출산을 준비했다. 초음파 검사 등 산전 검사에서는 특이 소견이 없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출산한 아기는 울음을 터뜨리지 못했고 전신이 푸르게 변하는 청색증이 관찰됐다. 탯줄 압박과 태변 흡입으로 인한 질식 가능성이 제기됐다. 신생아는 중환자실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다. A씨는 분만 중 태아 심박수 이상이 감지됐음에도 응급 제왕절개 등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의료진의 과실을 지적했다. 병원 측은 불가피한 사고라는 입장이었다.
재판부는 불확실성이 큰 분만 과정의 특성을 인정하면서도 의료진의 책임을 30%로 제한했다. 평생 치료비, 보조기구 구입비, 간병 비용, 위자료 등을 감안한 결과였다. 양측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제기했고, A씨는 별도로 산부인과 교수와 전공의를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로 고소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현재 형사 재판을 앞두고 있다.
◆ 의료계 “불가항력 사고에 형사처벌은 부당”
형사 기소 소식이 알려지자 의료계는 강력한 우려를 표했다. 대한의사협회, 대한의학회, 대한산부인과학회 등은 잇따라 성명을 내고 “예측 불가능한 분만 과정에서 발생한 불가항력적 사고를 형사 책임으로 몰아가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젊은 산과 교수 모임 역시 “결과 중심의 형사적 판단은 진료 위축을 불러와 결국 분만 현장이 붕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각에서는 분만 의료사고에 한해 형사 고소 자체를 막거나 처벌을 면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 환자단체 “피해자 입장 외면 말아야”
반면 환자단체는 다른 시각을 내놨다. 환연 측은 “전공의 과정을 거친 의사가 누구보다 동료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소송과 고소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며 “그만큼 피해자가 겪는 좌절과 분노가 크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안상호 한국선천성심장병환우회 대표는 “민사소송과 형사고소는 피해자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며 “이를 두고 피해자를 가해자로 몰아가는 식의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고 말했다.
안기종 환연 대표 역시 “의료과실이 없다는 병원 측 주장에 맞설 수단은 결국 법적 절차뿐”이라며 “의료진을 형사고소했다고 해서 피해자가 부당한 행위를 한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의사단체가 동료 보호에는 앞장서면서도 정작 환자 피해 구제에는 소극적”이라고 비판했다.
◆ 합의보다 소송 택한 배경
이 사건은 뇌성마비 진단이 나온 지 2년가량 지난 뒤에 소송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합의를 통한 해결 시도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결과적으로 법정으로 향했다. A씨는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을 거치지 않고 직접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 측은 여전히 “과실은 없었으며 불가항력적 사고였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 제도 개선 목소리
환자단체는 이번 사안을 계기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안상호 대표는 “민사소송의 경우 병원이 대부분 배상 책임을 지지만, 형사 고소는 환자 개인이 억울함을 풀기 위한 수단으로 제기되는 경우가 많다”며 “의사단체가 책임은 지지 않은 채 면책만 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그는 또한 “국가가 고위험 필수 의료 분야에 더 많은 재정을 투입해 의료진의 부담을 줄이고, 손해배상금이나 보험료 일부를 공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번 사건은 의사가 동료 의사를 고소한 드문 사례로, 필수의료의 위기와 환자 권리 보장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촉발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