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도 대부분 모른다... 전 세계 식량난 해결한 '한국 토종 곡식'
2025-10-1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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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녹색 혁명’ 이끈 한국 토종 곡식의 정체

한국인의 밥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 한 곡식이 전 세계 식량 위기 해결의 주인공이 됐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키가 작고 볼품없어 보여 오랫동안 천대받았던 토종 곡물 '앉은뱅이밀'이 세계 밀 혁명을 이끈 핵심품종이었다는 이야기는 마치 영화와도 같은 스토리를 품고 있다.
앉은뱅이밀은 기원전 300년 전부터 우리 땅에서 자라온 토종밀이다. 키가 50~80cm로 작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반적인 밀이 1m 이상 자라는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작은 편이다. 하지만 이 작은 키가 오히려 큰 장점이 됐다. 수확량이 많고 병해에 강한 앉은뱅이밀의 특성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운명의 전환점은 일제강점기에 시작됐다. 1905년 일본이 한국토지농산조사를 시행하면서 앉은뱅이밀을 가져가 개량한 뒤 이를 '농림10호'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진짜 드라마는 이후에 펼쳐졌다. 앉은뱅이밀의 우수성을 눈여겨본 미국의 한 농학자가 다시 육종해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미국인이 바로 노먼 볼로그다. 1914년 출생한 미국의 농학자이며 식물병리학자인 볼로그는 세계적인 식량 증산에 기여해 녹색 혁명을 이끈 공로로 1970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볼로그는 일본이 개량한 농림10호와 멕시코 재래종을 교배해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냈다. 노먼 볼로그가 다시 '소노라 64호'로 개량해 멕시코 등에 보급했다. 덕분에 멕시코는 밀 수입국에서 밀 수출국이 됐다.
소노라 64호의 성공은 단순히 한 나라의 농업 혁신을 넘어섰다. 20세기 중반 동안 볼로그는 멕시코 외에도 파키스탄, 인도 등에 개량 밀을 소개하고 재배법을 가르쳤다. 그 결과 세계 곳곳에서 식량 증산이 이뤄졌고, 이는 '녹색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한국의 토종 앉은뱅이밀이 전 세계 기아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된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앉은뱅이밀의 고향인 한국에서는 이 귀한 품종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값싼 수입밀이 들어왔다. 1982년엔 밀 수입 자유화가 이뤄졌다. 1984년에 정부가 밀 수매를 중단하면서 국내 밀 생산 기반이 급격히 무너지고 밀 농사를 거의 짓지 않게 됐다. 앉은뱅이밀은 값싼 수입밀에 밀려 생사기로에 서게 됐다. 밀 수입 자유화와 밀 수매 중단으로 인해 그나마 명맥을 이어오던 앉은뱅이밀과 우리밀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상황이 바뀐 것은 1990년대부터다. 1991년 농업인과 소비자 주도로 우리밀살리기운동이 일어나면서 우리밀은 다시금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앉은뱅이밀에 대한 관심은 부족했다. 1990년대부터 우리밀살리기운동으로 개량종 경질밀인 금강밀과 조경밀이 확산하면서, 한국산 밀은 맛이 없다는 인식이 퍼져 연질밀인 앉은뱅이밀까지 함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현재 앉은뱅이밀의 주산지는 경남 진주시 금곡면이다. 이곳에선 연간 120톤의 밀이 재배되고 있다. 품질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특별한 판매 마케팅 없이도 전량 국내에서 직거래로 판매되고 있다.
앉은뱅이밀이 세계적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 우수한 특성 때문이다. 키가 작아 바람에 쓰러지지 않고, 수확량이 많으며, 각종 병해충에 강하다. 또한 글루텐 함량이 적어 소화가 잘되고, 단백질과 무기질 함량이 높아 영양학적으로도 우수하다.
세계 곳곳에서 기후변화와 식량 부족 문제가 대두하면서 앉은뱅이밀과 같은 토종 품종의 가치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수천 년 동안 한반도 기후에 적응해온 이 토종밀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식량 안보에 기여할 수 있는 소중한 유전자원이다.
한국이 버린 토종밀을 미국인이 찾아내 세계 식량 혁명을 일으킨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토종 품종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외국 품종에만 의존하다가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