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코미디계의 큰 별이 졌다... 타계한 개그맨 전유성은 누구
2025-09-2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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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그계의 산 증인... 개그맨 용어 최초 사용

느릿한 말투 속에서 피어나는 촌철살인의 유머. 진중한 표정으로 던지는 한마디로 사람들의 배꼽을 잡게 만들던 특별한 재능의 소유자가 우리 곁을 떠났다. 폐기흉 악화로 25일 전북대학교병원에서 숨을 거둔 전유성(76)은 단순한 코미디언을 넘어 한국 개그계의 산 증인이다.
1949년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연출과를 졸업한 후 정극 배우의 꿈을 품었다. 하지만 여러 번의 시련을 겪으며 방향을 틀어 코미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MC 겸 코미디언 '후라이보이' 곽규석의 ‘쇼쇼쇼’ 녹화장에 구경을 갔다가 화장실까지 따라가 "원고는 누가 써요?"라고 물으며 시작된 인연이 그의 연예계 생활의 출발점이 됐다.
전유성은 대한민국에서 개그맨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인물로 기록된다. 당시에는 코미디언이라는 익숙한 표현을 놔두고 생소한 개그맨이라는 말을 쓴다고 선배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이 용어는 한국 코미디계의 표준이 됐다. 사실 이 용어의 제안은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 '0시의 다이얼'에 함께 출연했던 팝 전문가 신동운이 했지만, 전유성이 이를 적극 사용하며 대중화했다.
전유성의 개그 스타일은 당시 주류였던 슬랩스틱이나 바보 연기와는 달랐다. 몸보다는 말로 웃음을 유발하는 '슬로우 개그'의 선구자였던 그는 진지한 톤에서 황당한 발언으로 웃기는 독특한 방식을 구사했다. 한번쯤 더 생각해야 이해되고 웃긴다는 그의 개그는 TV 방송의 빠른 진행과는 맞지 않았지만, 그만의 고유한 색깔로 자리잡았다.
전유성은 단순한 개그맨을 넘어 한국 코미디계의 '아이디어 뱅크' 역할을 했다. 아이디어가 막히면 전유성을 찾아가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았을 정도로 그의 창의성은 업계에서 인정받았다. KBS의 간판 프로그램이었던 '개그콘서트'의 원안자이기도 한 그는 대학로에서 이뤄지던 소극장 개그를 방송으로 끌어들인 당사자로 평가받는다.
후배 개그맨들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했다. '코미디 시장'이라는 극단을 운영하며 안상태, 김대범, 황현희, 박휘순, 신봉선, 김민경 등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희극인들을 다수 발굴했다. 예원예술대학교 코미디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조세호, 김신영 등을 제자로 키워내기도 했다. 최양락을 비롯한 많은 후배가 그를 스승으로 여기며 존경을 표했던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전유성은 코미디계의 악습이던 똥군기 문화를 거부한 인물이기도 하다. 자신이 선배들로부터 받았던 부당한 대우를 후배들에게는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폭력은 딱 내 선에서만 끝내고 대물림은 하지 말자'는 그의 철학은 후배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연예계와 그 외 분야를 넘나들며 다양한 재능을 발휘한 것도 그의 특징이었다. 광고 카피라이터로 활동하며 영화 '부시맨'의 ‘하늘에서 콜라병 하나가 떨어지며 영화가 시작됩니다’라는 명카피를 남겼고, 컴퓨터 관련 저서로 정보통신부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심야 볼링장, 심야 극장 등 지금은 일상이 된 사업 아이디어들을 선구적으로 제안한 아이디어맨이기도 했다.
말년에는 경북 청도군에서 '니가 쏘다쩨'라는 카페와 코미디철가방극장을 운영하며 지역 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 하지만 청도군청과의 갈등으로 2018년 전북 남원으로 터전을 옮겨 2022년부터는 '국수교과서'라는 국수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2024년 들어서는 급성 폐렴, 부정맥, 코로나19로 세 차례나 입원하는 등 건강이 악화됐다. 그럼에도 유튜브 방송에 출연하며 후배들과의 소통을 이어갔던 그는 결국 폐기흉 증세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한국방송코미디언협회장으로 진행되며,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다. 유해는 주 활동무대였던 KBS에서 노제를 치른 뒤 말년을 보낸 남원 지리산 자락에 수목장으로 안장된다.
"느려야 더 빛나는 사람이 있다"고 했던 그의 말처럼, 전유성은 급하지 않은 리듬 속에서도 깊이 있는 웃음과 따뜻한 인간미를 전해준 진정한 코미디언이었다. 한국 개그계의 큰 별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