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석학 "현재 우크라이나전 승자, 러시아 아니라 우크라이나" 단언
2025-09-29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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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 "시아, 20만~30만 사상자 내고도 우크라 영토 0.6% 점령"
2022년 2월 24일(현지시각)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향해 진격했을 때 세계는 며칠 내 전쟁이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서방 국가들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망명 정부 수립을 제안했다. 그러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내게 필요한 건 탈출용 차가 아니라 탄약"이라고 답하며 키이우에 남았다. 그로부터 3년 7개월이 지났다. 전쟁의 승자는 누구일까.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우크라이나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라리는 27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에서 "러시아 프로파간다가 퍼뜨린 서사와 달리 우크라이나는 지금까지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전쟁은 더 많은 땅을 정복하거나 더 많은 도시를 파괴하거나 더 많은 사람을 죽인 쪽이 이기는 게 아니라 정치적 목표를 달성한 쪽이 이긴다"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미 그의 핵심 전쟁 목표인 우크라이나 국가의 파괴에 실패했다"고 강조했다.
하라리는 2022년 러시아의 전면 침공 당시 상황을 상기시켰다. 러시아 지도부와 전 세계 많은 관측자들은 러시아가 며칠 내 키이우를 점령하고 우크라이나군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킬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군은 키이우 공격을 격퇴했고, 2022년 늦여름 반격에 나서 하르키우와 헤르손 지역에서 두 차례 주요 승리를 거뒀다.
하라리는 러시아가 2022년 봄 이후 키이우, 하르키우, 헤르손 같은 주요 전략적 목표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러시아군은 약 20만~30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도 우크라이나 전체 영토의 약 0.6%에 해당하는 국경 지대만을 점령했다. 하라리는 "진격 속도로 계산하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나머지 지역을 정복하는 데 이론적으로 약 100년과 수천만 명의 사상자가 필요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지난달 러시아가 통제하는 우크라이나 영토는 2022년 8월보다 적다.
하라리는 이 상황을 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에 비유했다. 당시 장군들은 수만 명의 병사를 희생시켜 고작 몇 킬로미터를 진격하는 데 그쳤다. 애국적인 신문들은 큰 축척의 지도를 사용해 진격을 인상적으로 보이게 했지만 실제로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해상에서도 우크라이나의 성과는 인상적이었다고 하라리는 밝혔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 흑해함대는 완전한 해군 우위를 점했다. 그날 러시아 흑해함대의 기함 모스크바 순양함은 스네이크 섬의 소규모 수비대에 항복을 요구했다. 우크라이나 수비대는 "러시아 군함아, 꺼져"라고 맞대응했다. 스네이크 섬은 곧 러시아에 점령됐지만 2022년 6월 말 우크라이나가 탈환했다. 그때까지 모스크바호를 비롯한 수많은 러시아 함선이 흑해 해저에 가라앉았다. 우크라이나는 미사일과 드론을 혁신적으로 활용해 러시아의 해군 우위를 무력화했고, 해전의 성격 자체를 바꿨으며, 흑해함대 잔존 세력을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항구로 후퇴시켰다.
공중전에서도 러시아는 실패했다. 지난 6월 이스라엘이 이란과의 12일 전쟁에서 단 한 대의 유인 항공기도 잃지 않고 약 36시간 내에 이란 상공을 장악한 것과 달리, 러시아는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상공 장악에 실패했다. 러시아 공군은 특히 6월 우크라이나의 전략폭격기 공격으로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다.
하라리는 우크라이나가 외부의 직접적인 군사 개입 없이 이 모든 것을 달성했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전쟁에 직접 개입한 유일한 제3자는 1만 명 이상의 병사를 러시아를 위해 파견한 북한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자원을 대규모로 지원했지만, NATO 군대는 실제 전투에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하라리는 또한 2022년 2월 24일 이전과 그 이후 오랫동안 NATO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많은 종류의 정교한 중화기 제공을 거부하고 다른 무기의 사용을 제한했다고 지적했다. 일부 제한은 여전히 유효하다. 2022년 우크라이나는 제한된 무기로 키이우, 하르키우, 헤르손에서 승리를 거뒀다. 처음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면 러시아가 군대와 전시 경제를 재건하기 전인 2022년 말이나 2023년 여름까지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라리는 주장했다.
하라리는 현재 우크라이나 방어의 가장 약한 고리는 서방 우방국들의 마음에 있다고 진단했다. 러시아가 공중 및 해상 우위를 확보하거나 육상에서 우크라이나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실패하자, 러시아는 미국인과 유럽인의 의지를 공격함으로써 우크라이나의 입지를 우회하려 하는 전략을 꺼내들었다. 러시아의 승리가 불가피하다는 프로파간다를 퍼뜨려 미국인과 유럽인이 의욕을 잃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며 항복을 강요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하라리는 러시아가 계속 군대와 전시 경제를 확장하는 가운데 유럽은 재무장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러시아군과 폴란드 바르샤바, 독일 베를린, 프랑스 파리 사이에 서 있는 가장 크고 경험 많은 전투 부대가 우크라이나군이라고 지적했다. 폴란드, 독일, 프랑스군은 각각 약 20만 명의 병사를 보유하고 있지만 대부분 전투 경험이 없다. 반면 우크라이나군은 약 100만 명의 병사를 보유하고 있으며 대부분이 노련한 베테랑이다.
하라리는 최근 러시아 전투기가 에스토니아를 침범하고 러시아 드론이 폴란드와 루마니아(아마도 덴마크도) 상공에 나타난 사실을 언급하며, 러시아가 유럽을 공격하고 미국이 싸움에서 빠지기로 선택한다면 유럽의 가장 큰 군사 자산은 우크라이나군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미군 역시 우크라이나의 전장 경험과 최첨단 무기 산업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했다. 특히 드론 전쟁 분야에서 우크라이나의 혁신과 데이터는 세계 최고 수준이며, 이것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우크라이나를 더 지지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라리는 전쟁의 향방은 미래의 결정에 달려 있어 예측할 수 없지만,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우크라이나의 승리는 이미 결정적이고 되돌릴 수 없다고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은 2021년 7월 발표한 장문의 성명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통일에 관하여'에서 우크라이나는 결코 진정한 국가가 아니었으며, 외세가 러시아를 약화시키기 위한 책략으로 조장한 가짜 실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국가가 존재하지 않으며 우크라이나인은 실제로 러시아인이고, 기회만 주어지면 우크라이나인들이 기꺼이 모국 러시아에 흡수될 것이라는 점을 세계에 증명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
하라리는 푸틴의 망상과 야망 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죽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분명해진 한 가지는 우크라이나가 실재하는 국가이며 수백만 우크라이나인이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끝까지 싸울 의지가 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하라리는 "국가는 땅덩어리나 핏방울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들 마음속의 이야기, 이미지, 기억으로 만들어진다"며 "앞으로 몇 달 동안 전쟁이 어떻게 전개되든, 러시아 침공의 기억, 러시아의 만행과 우크라이나의 희생은 앞으로 여러 세대 동안 우크라이나 애국심을 계속 지탱할 것"이라고 말하며 글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