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풀인데... 다른 나라에선 나무로 자라는 '한국인 다 아는 채소'
2025-10-09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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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채소 작물, 중남미 열대에 심으면 나무처럼 자란다는데...
매년 봄 모종을 심어 가을에 뽑아내는 고추. 한국인의 밥상에 빠질 수 없는 고추를 생산해주는 이 작물이 원산지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가지과 식물인 고추는 온대 지방에서는 한해살이풀이지만, 중남미 열대 지방 같은 원산지에서는 여러 해 동안 자라는 관목, 즉 나무처럼 키가 크고 줄기가 단단한 형태로 성장한다.
고추의 원산지는 멕시코와 중남미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따뜻한 기후에서 고추는 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고 계속 자라며, 몇 년간 열매를 맺는다. 줄기는 목질화돼 나무처럼 단단해지고, 높이도 1m를 훨씬 넘어 관목의 형태를 갖춘다. 반면 한국을 비롯한 온대 지방에서는 겨울철 영하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기 때문에 매년 새로 심어야 하는 한해살이 작물로 재배된다.
사실 고추가 한해살이로 재배되는 것은 기후적 제약 때문이지 식물 자체의 특성 때문은 아니다. 고추는 본래 서리를 맞으면 죽는 열대성 작물이다. 한국의 경우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 때문에 고추가 월동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농가들은 매년 4월에서 5월 사이 모종을 심고 여름부터 가을까지 수확한 뒤 서리가 내리기 전에 뿌리째 뽑아내는 방식으로 재배해왔다.
그러나 최근 시설재배 기술이 발달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온실이나 비닐하우스에서 겨울철 난방을 통해 일정 온도 이상을 유지하면 고추를 죽지 않게 키울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농가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 지역 농가는 고추를 2~3년간 연속으로 재배하며 안정적인 수확을 이어가고 있다.
이 같은 고추의 특성에 주목한 한국 농가들이 최근 고추를 다년생 작물로 키우는 방식을 본격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온실이나 비닐하우스 같은 시설재배 환경에서 겨울철 난방을 통해 온도를 유지하면 고추를 여러 해 동안 키울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한 것이다.
다년생 고추 재배의 가장 큰 장점은 노동력 절감이다. 매년 모종을 구입하고 심는 수고를 덜 수 있으며, 뿌리가 깊게 내려 병충해에도 강해진다. 또 첫해에 비해 2년차, 3년차에 줄기가 굵어지고 가지가 많아져 수확량이 늘어나는 효과도 있다. 일반적으로 1년차 고추는 줄기 직경이 1~2cm 수준이지만, 2년차가 되면 3~4cm로 굵어지고 목질화가 진행된다. 3년차에는 줄기 직경이 5cm 이상으로 자라며 완전히 나무 형태를 갖추게 된다.
수확량 측면에서도 장점이 있다. 1년차에는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키우는 데 상당한 에너지를 쓰지만, 2년차부터는 이미 튼튼한 뿌리와 줄기가 형성돼 열매 생산에 더 많은 양분을 집중할 수 있다. 일부 농가 사례를 보면 2년차 고추의 수확량이 1년차보다 20~30% 증가했다는 보고도 있다.
다만 겨울철 난방비용이 추가로 들고 연작으로 인한 토양 피로도 관리가 필요하다는 과제도 있다. 특히 같은 땅에서 계속 고추를 키울 경우 토양 내 특정 양분이 고갈되고, 병원균이 축적될 위험이 있다. 이 때문에 다년생 재배를 하는 농가들은 토양 검정을 주기적으로 실시하고, 퇴비와 미생물 제제를 투입해 토양 건강을 유지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다.
농촌진흥청 등 농업 연구기관에서도 다년생 고추 재배 기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적정 온도 유지 방법, 가지치기 시기, 병해충 방제 등 다년생 재배에 최적화된 기술 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특히 겨울철 최저 온도를 몇 도로 유지해야 고추가 건강하게 월동하는지, 봄철 새순을 틀 때 어떤 관리가 필요한지 등 세부 재배 기술이 축적되고 있다.
가지치기 기술도 중요한 요소다. 다년생으로 키울 경우 묵은 가지와 새 가지를 적절히 관리해야 수확량을 유지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면 묵은 가지 중 일부를 잘라내고 새순이 나올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 과정에서 적절한 가지치기 시기와 방법을 찾는 것이 재배 성공의 핵심이다.
스마트팜 기술을 접목해 온도와 습도를 자동으로 조절하면서 고추를 관목처럼 키우는 방식이 확산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센서를 통해 온실 내부 환경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난방과 환기를 자동으로 제어하면 농가의 관리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이미 일부 스마트팜 운영 농가에서는 이 같은 시스템을 도입해 다년생 고추 재배를 시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에서는 이미 고추를 다년생으로 재배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온실 재배가 발달한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에서는 파프리카를 비롯한 고추류를 2년 이상 키우며 연중 수확하는 농가가 많다. 열대 국가에서는 노지에서도 자연스럽게 고추가 관목으로 자라 여러 해 동안 열매를 맺는다. 멕시코나 페루 같은 원산지에서는 5~6년 이상 자란 고추 나무도 흔하게 볼 수 있다.
특히 관상용이나 특수 품종 고추의 경우 다년생 재배가 더욱 활발하다. 하바네로, 할라피뇨 같은 품종은 열대 지방에서 여러 해 동안 키우며 지속적으로 수확한다. 이들 품종은 한국에서도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화분에 심어 실내에서 키우는 경우가 있는데, 겨울철 실내 온도가 유지되면 여러 해 동안 살아남아 열매를 맺는다.
한국 농업 현장에서 다년생 고추 재배가 더 확산하려면 경제성 확보가 관건이다. 난방비와 관리비용을 상쇄할 만큼 수확량이 늘어나고 품질이 유지돼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에너지 비용이 만만치 않아 대규모 확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신재생에너지를 활용한 난방 시스템이나 지열 활용 등 에너지 비용을 낮추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경제성이 개선될 여지는 있다.
그럼에도 고령화로 농촌 노동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파종과 정식 횟수를 줄일 수 있는 다년생 재배 방식은 매력적인 대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시설재배 면적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를 고려하면, 다년생 고추 재배는 앞으로 더욱 주목받을 가능성이 크다. 매년 새로 심던 고추가 나무처럼 자라는 모습은 그리 먼 미래의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