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소음을 잠재우니, 억새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2025-10-20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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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서창, 10년째 가을을 물들인 '느림의 축제'
스마트폰 대신 LP판, 경쟁 대신 '멍때리기'에 열광한 이유

[위키트리 광주전남취재본부 노해섭 기자]숨 가쁜 도시의 일상에 쉼표를 찍고 싶을 때, 사람들은 어디로 향할까. 지난 16일부터 나흘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광주 영산강변 서창들녘에 있었다.

올해로 열 번째 가을을 맞이한 '광주서창억새축제'는 시끌벅적한 음악과 화려한 조명 대신, 바람과 햇살, 그리고 자연의 소리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며 대한민국 대표 '힐링 축제'의 품격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아무것도 하지 않기'

축제의 마지막 날, 은빛 억새밭 한가운데서 세상에서 가장 고요하고도 치열한 대회가 열렸다. 바로 '멍때리기 대회'. 70명의 참가자는 90분 동안 오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미션에 도전했다. 스마트폰 알림도, 끝없는 생각의 소음도 잠시 꺼둔 채, 흐르는 구름과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시간. 이 역설적인 경쟁의 끝에, 참가자들의 얼굴에는 승패를 떠나 진정한 휴식에서 오는 평온함이 가득했다.

####귀를 열자, 자연이 말을 걸어왔다

올해 축제가 특별했던 이유는 단연 '소리'에 집중한 감성 프로그램 덕분이다. 처음 선보인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는 참가자들이 전문 장비를 끼고 억새밭을 거닐며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억새의 서걱임 같은 미세한 자연의 소리를 증폭해 듣는 몰입형 산책 프로그램이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자,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자연의 경이로운 오케스트라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한편, 억새밭 한가운데 마련된 'LP 억새라운지'에서는 지지직거리는 잡음마저 정겨운 아날로그 음악이 흘러나와, 방문객들을 추억 속으로 이끌며 감성적인 휴식을 선물했다.

####노을맛집, 석양빛 아래 펼쳐진 가을 피크닉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서창들녘은 또 다른 마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눔누리숲'에서 '서창감성조망대'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붉게 타오르는 석양과 은빛 억새의 물결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냈다. 이 장관은 SNS를 통해 '#노을맛집'이라는 애칭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돗자리와 도시락을 챙겨 든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며 최고의 가을 피크닉 명소로 떠올랐다.

김이강 서구청장은 "지난 10년간 서창억새축제는 빠름보다 느림을, 인공적인 화려함보다 자연 그대로의 가치를 추구해왔다"며, "앞으로도 시민들의 지친 마음에 위로와 쉼을 주는 대한민국 최고의 자연생태 힐링축제로 키워나가겠다"고 약속했다. 10년의 시간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도시인들에게 가장 순수한 형태의 휴식을 선물한 억새의 물결은, 내년 가을 더 깊어진 감성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며 막을 내렸다.

home 노해섭 기자 nogary@wikitr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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