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 수천만원서 수억원인데... 은퇴하면 '식재료'로 전락하는 비운의 동물
2025-10-24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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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에 설 수 없는 순간 존재가 지워지는 이 동물의 정체

최근 5년간(2020~2024년 8월) 퇴역한 경주마 6741마리 중 절반이 넘는 3461마리(51.3%)가 폐사했고, 303마리(4.5%)는 행방이 묘연한 '미상' 상태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조경태 국민의힘 의원이 한국마사회로부터 제출받아 24일 공개한 '퇴역마 활용 현황' 자료에서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났다. 
경주마의 평균 은퇴 나이는 5~8세에 불과하다. 말의 평균 수명이 25~30세다. 트랙을 떠난 뒤에도 20년 가까이 더 살 수 있는 생명들이 불과 몇 해 만에 절반 이상 죽거나 사라진 셈이다.
경주마는 0~1세부터 기본적인 순치 훈련, 1~2세부터 본격적인 경주마 트레이닝을 받는다. 훈련에는 신체 운동, 적절한 영양 섭취, 수의학적 치료,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이 결합돼 있다. 이처럼 철저하게 관리받던 말들이 은퇴 후 직면하는 현실은 참혹하다. 경주마 몸값이 최소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른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이없을 정도다.
한국마사회는 '동물복지 선진화'를 내세우며 다양한 정책을 홍보해 왔지만, 실제 관리 시스템은 여전히 허술하다. 퇴역마 관리가 '자율신고제'에 의존하는 탓에 말이 어디로 팔려갔는지,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는지 파악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공식적으로는 '승용 전환'이나 '분양'으로 분류되더라도, 일부는 음성적으로 도축장이나 '폐마목장'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마사회 등에 따르면 퇴역마 중 42.2%만 관상, 교육, 번식, 승용 등 다른 용도로 '재활용'된다. 48.1%는 질병 및 부상 등의 이유로 도축된다. 경주마 가운데 퇴역 이후 정확한 용도가 파악되지 않는 '기타용도' 비율이 2016년 5.0%에서 2017년 6.4%, 2018년 7.1%, 2019년 7.4%, 2020년 22.5%로 늘었다. 숫자로 따지면 2020년에만 퇴역 경주마 308마리의 행방이 묘연하다.
퇴역마에 대한 학대와 방치의 실상이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다. 지난해 1월에는 퇴역 경주마가 제주도 말 도축장 입구 100m 앞에서 동물보호단체에 의해 도축 직전 구조됐다. 이 말은 현역 시절 10번 넘게 경주에 출전해 상금 약 3830만 원을 벌어들였다. 은퇴 후 번식마로 용도가 전환돼 새끼 여덟 마리를 낳은 후 도축장에 팔렸다. 구조 후 건강 검진에선 이상이 없었다. 건강함에도 쓰임을 다했다는 이유로 식재료로 전락하는 셈이다. 
2022년 8월엔 동물보호단체가 충남 부여의 한 폐목장에서 퇴역마 두 마리를 구조했다. 구조된 직후 보호 시설로 옮겨진 말들은 장기간 방치돼 앙상히 마른 모습이었다.
2021년에는 방송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낙마 장면을 위해 강제로 넘어진 퇴역 경주마가 일주일 만에 죽었다. 동물보호단체는 이 말의 나이를 5~6세로 추정했다. 사람 나이로는 30~40대에 죽은 셈이다.
2019년에는 미국 동물보호단체 페타(PETA)가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퇴출된 국내 경주마들이 잔인하게 도살되는 장면을 공개했다.
한국마사회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22년까지 10년 동안 안락사된 말은 695마리다. 해마다 평균 약 70마리가 안락사를 당했다. 다친 말을 치료하고 관리하려면 한 달에만 200만 원이 넘게 든다. 비용이 부담돼 치료가 아닌 안락사를 선택하는 마주들도 있다. 완치해도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판단되면 서슴없이 퇴역시킨다.
퇴역마들을 위한 복지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마사회 매출이 7조~8조 원을 헤아리지만 퇴역마 복지를 위한 정부 차원의 예산은 5억 원도 안 된다. 정부 차원의 예산이 부족하다 보니 현재 말 복지는 '더러브렛 복지기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해당 기금은 퇴역마 보호를 위해 한국마사회와 경마업계 종사자가 기부한 돈이다. 연간 20억 원 규모다.
경마 선진국과 비교하면 한국 퇴역마 신세를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은 민간 퇴역마 관리 시설·목장 인증 및 승용전환·은퇴 돌봄 등 사업 위탁 및 재원 지원을 하고 있다. 영국은 퇴역마 공식 복지 자선단체를 비롯해 다수의 민간단체를 운영 중이다. 홍콩의 은퇴 말들은 퇴역 경주마 관리시설에서 관리를 받는다.
동물권 단체들은 경주마의 전 생애 복지체계 구축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매년 경마로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이는 한국마사회에도 도의적 책임을 묻는다.
조경태 의원은 "마사회가 겉으로는 도심 승마 체험 등 화려한 홍보로 국민을 기만하고, 뒤편에서는 경주마들의 비극을 외면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그는 "호주, 일본 등 경마 선진국처럼 경마 상금이나 매출액의 일정 비율을 의무적으로 '말복지 기금'으로 적립해 퇴역마의 남은 생을 체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며 "마사회가 동물복지에 대한 책무를 다하도록 국감에서 시정을 촉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마장은 늘 환호로 가득하지만 그 함성 뒤에는 들리지 않는 말의 울음소리가 있다. 화려한 질주의 끝에서 퇴역마가 맞이하는 건 평화로운 목초지가 아니라 도축장이다. 비극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