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세대, 밈으로 정권을 무너뜨렸다… 유럽 최초 사례

2025-12-1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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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세대가 온다"… 틱톡 세대, 불가리아 총리 끌어내려

의회 건물 앞 거대한 스크린에서 정치인들을 조롱하는 밈이 끊임없이 재생됐다. 틱톡으로 조직된 Z세대는 ‘Z세대가 온다’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거리를 가득 메웠다. 유럽에서 Z세대가 주도한 시위로 정부 수반이 물러난 첫 사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의회 건물 앞을 가득 메운 시위자들. / 'Times News' 유튜브 채널
의회 건물 앞을 가득 메운 시위자들. / 'Times News' 유튜브 채널

로센 젤랴스코프 불가리아 총리가 11일(현지시각) 의회 불신임안 표결 직전 사임을 선언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모든 연령과 민족, 종교의 사람들이 사임을 요구하고 있다"며 "권력은 국민의 목소리에서 나온다"고 밝혔다. 최근 수주간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이어진 끝에 나온 결정이었다.

시위의 발단은 2026년 예산안이었다. 정부가 발표한 예산안에는 민간 부문에 대한 사회보장 분담금 인상과 배당세 증가가 포함돼 있었다. 이를 통해 공무원과 군인, 사법부 인력의 급여를 대폭 인상한다는 계획이었다. 시민들은 민간이 부담을 떠안고 공공부문만 혜택을 받는 불공정한 구조라고 반발했다.

첫 시위는 지난달 26일 약 2만 명이 참여하면서 시작됐다. 야당 연합인 '우리는 계속한다-민주주의 불가리아'가 주도한 이 시위는 의회 건물을 포위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시위대는 의원들이 건물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인간 띠를 만들었고, 경찰과의 충돌도 발생했다.

정부는 다음날인 27일 예산안 논의를 중단하고 노조 및 기업들과의 대화를 약속했다. 하지만 시위는 오히려 더 큰 규모로 확산됐다. 지난 1일에는 소피아에만 5만~10만 명이 모였고, 플로브디프, 바르나, 부르가스 등 주요 도시에서도 수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2020~2021년 반부패 시위 이후 가장 큰 규모였다.

이날 시위의 특징은 Z세대가 전면에 나섰다는 점이다. 1997년부터 2012년 사이에 태어난 이 세대는 틱톡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조직화했다. 전통적인 정당 구조와 국영 언론을 우회해 자체적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이다. 의회 건물 앞에는 ‘Z세대가 온다’, ‘마피아 없는 젊은 불가리아’라고 적힌 거대한 현수막이 내걸렸다.

의회 건물 앞을 가득 메운 시위자들. / 'Times News' 유튜브 채널
의회 건물 앞을 가득 메운 시위자들. / 'Times News' 유튜브 채널

18세 고등학생 마르틴 아타나소프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예산안이 시위의 이유지만 근본 원인은 우리가 불가리아에 남아 사업을 시작하거나 가정을 꾸릴 전망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다수 Z세대 시위 참가자들에게 이번은 생애 첫 대규모 시위였다.

시위대가 공격의 초점을 맞춘 인물은 2명이었다. 2009년부터 2021년까지 세 차례 총리를 지낸 보이코 보리소프와 과두재벌(국영기업 민영화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쌓은 소수의 신흥 재벌) 델리안 페브스키다. 페브스키는 광범위한 언론 제국을 소유하고 있으며,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부패와 뇌물, 횡령 혐의로 제재를 받은 인물이다. 그의 정당인 '새로운 시작을 위한 권리와 자유운동'이 현 소수 정부를 지지하고 있다.

시위대는 ‘델리안, 보이코, Z세대가 당신들을 은퇴시킬 것’, ‘우리에게 남을 이유를 달라’라고 적힌 팻말을 들었다. SNS에서는 "여자친구와 데이트하러 시위에 참여하세요"라는 밈이 유행했다. 인플루언서와 배우들도 시위에 합류했고, 의회 건물에는 정치인들을 조롱하는 영상이 반복 재생됐다.

틱톡 참여도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지난 1일 시위 이후 불가리아에서 시위 관련 콘텐츠에 참여한 사용자 수는 48만8000명으로 평소보다 70배 증가했다. 인플루언서 안드레아 반다 반다는 "이상적으로는 긴 분석글을 읽는 게 훨씬 낫지만, 밈은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매우 빠른 방법"이라며 "이렇게 많은 인플루언서가 시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결국 지난 1일 예산안을 철회했지만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시위대의 요구는 예산안 철회를 넘어 정부 사임과 조기 총선으로 확대됐다. 일부 시위대는 집권당 사무실로 이동해 경찰과 충돌했고, 쓰레기통이 불에 타고 경찰 차량이 파손되는 사태도 벌어졌다. 당국은 71명을 체포했다.

지난 10일 밤 수만 명이 다시 소피아 시내를 메웠다. 시위대는 "사임! 사임! 사임!", "마피아는 물러가라"고 외쳤다. 의회 건물 외벽에는 ‘사임과 감옥’이라는 문구가 조명으로 투사됐다. 이튿날 젤랴스코프 총리는 집권 연합 지도부와 회의를 한 뒤 사임을 발표했다.

의회 건물 앞을 가득 메운 시위자들. / 'Times News' 유튜브 채널
의회 건물 앞을 가득 메운 시위자들. / 'Times News' 유튜브 채널

젤랴스코프는 "시위는 오만과 거만에 대한 것이었지 사회적 시위가 아니었다"며 "정책이 아니라 태도에 대한 것이었고, 따라서 불가리아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었다"고 말했다. 야당 지도자 아센 바실레프는 "이것이 불가리아가 정상적인 유럽 국가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사임은 불가리아가 다음달 1일 유로존에 가입하기 불과 3주 전에 나왔다. 유럽중앙은행(ECB)과 유럽위원회는 지난 6월 불가리아가 유로화 도입을 위한 5개 수렴 기준을 모두 충족했다고 확인했다. 유럽연합(EU) 재무장관회의는 7월 불가리아의 유로존 가입을 최종 승인했고, 레프화와 유로화의 환율은 1.95583레프당 1유로로 확정됐다.

경제 분석가들은 장기간의 정치적 불안정이 역사적인 통화 전환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소피아대학의 엘레나 디미트로바 박사는 "불가리아는 유로 도입의 기술적, 행정적 측면을 감독할 기능하는 정부가 필요하다"며 "은행 시스템 준비부터 대국민 교육 캠페인까지 모든 것이 정부 최고위급의 조율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불가리아는 지난 4년간 7차례 총선을 치르는 등 극심한 정치적 불안정을 겪어왔다. 가장 최근 선거는 지난 10월에 치러졌고, 젤랴스코프 정부는 어려운 협상 끝에 지난 1월 출범했다. 보리소프의 중도우파 정당 GERB, 불가리아 사회당, 포퓰리즘 성향의 '이런 국민이 존재한다' 3개 정당이 연합한 소수 정부였으며, 페브스키의 정당이 외부에서 지지하는 구조였다.

정치적 혼란의 배경에는 뿌리 깊은 부패가 자리하고 있다.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한 2024년 부패인식지수에서 불가리아는 180개국 중 76위를 차지했으며, 100점 만점에 43점을 받았다. EU 회원국 중에서는 헝가리(41점)에 이어 두 번째로 부패한 국가로 평가됐다. 덴마크가 90점으로 1위를 차지한 것과 대조적이다.

불가리아는 2007년 EU에 가입했지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EU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가장 가난한 회원국이다. 국민의 30%가 빈곤 위험에 처해 있으며, 사법부 독립성과 법치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민주주의연구센터(CSD)의 마틴 블라디미로프 국장은 "이번 시위는 권력 유지를 위해 국가를 장악해온 뿌리 깊은 집권층의 관행에 맞서는 젊은 세대 시민들의 에너지가 충분하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Z세대의 반정부 시위는 불가리아만의 현상이 아니다. 최근 수개월간 네팔, 마다가스카르, 모로코, 케냐, 페루 등 전 세계 여러 국가에서 부패와 불평등에 반발한 Z세대가 거리로 나왔다. 일부 국가에서는 불가리아처럼 지도자가 물러나는 결과로 이어졌다.

위기분석기업 베리스크 메이플크로프트의 마리오 비카르스키 분석가는 "유로존에 막 들어가는 불가리아가 재정 정책과 관련된 사건으로 흔들리고 있다"며 "이는 유럽에 평판 리스크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불가리아의 혼란이 EU의 동부 국경 안정에 필수적인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전략에도 장기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불가리아 헌법에 따라 루멘 라데프 대통령은 일주일 이내에 과도 총리를 임명해야 하며, 향후 두 달 내에 새 선거가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 젤랴스코프 총리는 새 정부가 구성될 때까지 현안을 처리하는 직무 대행 자격으로 오는 18일 EU 정상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다.

불가리아의 18세 시위 참가자 테오도라는 "수년간의 부패와 억압, 거짓말과 헛된 약속 끝에 우리 젊은이들은 희망을 되찾고 단결하면 터널 끝에 빛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며 "이번에는 그들이 떠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home 채석원 기자 jdtimes@wikitr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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