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날 기다리던 '은퇴 경주마' 60마리를 데려왔더니 믿기지 않는 일이...
2025-12-16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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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경주마들의 제2막… 제주 '말의 숲'에서 찾은 새로운 삶
과천 경마장 트랙을 질주하던 경주마 '스노우'는 7연승을 달리며 2억 원이 넘는 상금을 벌어들였다. 관중의 환호 속에서 1등 테이프를 끊던 화려한 순간들. 하지만 부상으로 경기 출전이 불투명해지자 스노우는 버려지는 신세가 됐다. 말의 평균 수명은 30년 내외지만 경주마의 은퇴 시기는 평균 4, 5세에 불과하다. 은퇴 후 대부분은 종일 사람을 끄는 역마로 전락하거나 도축돼 그대로 생을 마감한다. 
EBS가 최근 방송한 'PD로그 - 버려진 말들의 안식처 말의 숲 이야기'는 이처럼 버려진 경주마들이 제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제주의 울창한 숲, 산방산과 바다가 펼쳐진 광경 속에 자리한 '말의 숲'에는 현재 50여 마리의 말이 살고 있다. 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풀과 흙의 냄새를 맡으며 말답게 살아가는 이곳은 한때 누군가에게 버려졌던 말들의 안식처다.
이곳을 운영하는 김남훈 씨는 2016년 제주에서 우연히 한 마리 경주마를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골프 선수 출신이던 그는 은퇴하고 제주에 왔다가 'JC'라는 경주마를 발견했다. 그는 "진짜 영양실조에 걸려서 뼈밖에 안 남아 있었다. 이가 다 빠지고 뼈만 앙상했는데 너무 가여워 ‘비용을 낼 테니 이 말을 내게 달라’고 했다"고 회상했다.
김 씨는 JC를 어머니 집 마당에서 키우기 시작했다. "종일 풀밭에서 풀을 먹이고 목욕시키고 사료를 주는 일을 매일 반복했다. 그렇게 1년을 돌보니 이 말이 건강을 되찾는 모습이 우리에게 진짜 힐링이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았던 JC가 생기를 되찾는 모습을 지켜본 김 씨의 눈에 다른 불쌍한 말들이 들어왔다.
김 씨는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60여 마리의 말을 구조해 왔다. 그중에서도 '루티'와 '루나'는 특히 아픈 손가락이다. "말을 도축한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충격적이었던 건 도축을 기다리는 루티와 루나가 임신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두 마리를 구조할 수 있었다. 만약 그날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이곳에 없었을 수도 있다.
김 씨는 "다 구조하지는 못하지만 내 눈앞에 나타난 말들만이라도 보듬고 이 아이들과 생활하다 보면 뭔가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기대로 쓰임을 다한 말들의 쉼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 씨의 하루는 해가 뜨면 시작된다. 말들이 아침밥 시간을 맞춰주지 않으면 짜증을 내기 때문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무조건 나가야 한다. 물과 사료, 잘 말린 건초를 들고 말 한 마리 한 마리를 돌며 아침밥을 일일이 챙겨준다.
말들도 베테랑이 나타나면 먹을 것을 준다는 걸 알기에 300~500kg 정도 나가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부린다. 트럭만 보면 별미가 있다는 걸 알아서 가만히 기다리지 못하고 쫓아온다. 김 씨는 "이런 기본적인 일상이 말들에게 내가 주인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진드기약을 챙기고 이발도 시키고 발톱도 깎아 주면서 말들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말들의 상태를 눈으로 하나하나 확인하며 진드기 활동이 왕성한 시기에는 약을 뿌리고, 상처가 있으면 간단한 치료까지 한다. 몸에 풀냄새, 흙냄새를 묻히며 스트레스를 푸는 말들을 목욕시키는 것도 베테랑의 몫이다.
늦봄에서 초가을까지는 주변 밭에 말을 두고 제주식 윤환 방목을 한다. 40㎡ 구역의 풀을 4일간 뜨게 하고 4일이 지나면 옆으로 옮기는 방식이다. 그럼에도 매일 아침마다 물과 사료, 건초를 챙겨 준다. "부드러운 생초만 계속 먹으면 똥을 너무 많이 싼다. 중간중간 건초를 주면 소화가 느려져서 포만감이 생긴다. 번거롭지만 그래도 더 신경을 쓰는 이유다.“
말을 관리할 때 ‘빨리빨리’는 절대 금물이다. "빨리 움직이면 말들이 맞는 줄 안다. 천천히 해야 한다." 김 씨는 "사료를 주고 관리를 해주고 진드기약을 쳐주고 발굽을 손질하다 보니 말들이 나를 자연스럽게 무리의 리더로 인식한다. 이것이 말들과 끊기지 않는 관계를 만드는 연결고리"라고 말했다.
말의 숲에서는 말똥을 판 돈으로 사료를 산다. 비가 흙과 똥을 쓸어내려가면서 흙의 얇은 입자가 말똥과 섞인다. 그러면 냄새가 전혀 나지 않고 영양이 풍부한 흙이 된다. 텃밭이나 조경용으로 인기가 좋아 없어서 못 팔 정도다. 말똥을 판 돈으로 50여 마리 말들의 일주일치 사료가 채워진다.
마을의 농로나 밭에 자란 골칫덩이 잡초를 말이 먹어주고 퇴비까지 제공하는 방식으로 마을과도 상생하고 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후문에 있는 2000평 땅의 풀을 말에게 먹여 달라고 하셨다. 그러자 한 분 한 분 요청이 늘어났다." 이장과 마을 사람들이 말들을 예쁘게 봐주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농로나 밭의 잡초를 말이 먹어 주니 마을 주민의 일손과 근심이 모두 덜어졌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를 10년간 연출한 김경민 PD는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말의 숲에서 4일간 생활하며 말들을 직접 돌봤다. 김 PD는 스노우를 끌고 가다가 갑자기 말이 꿈쩍도 안 하는 상황을 맞았다. 당황했는데 김 씨가 이유를 알려줬다. "이 말은 발을 다쳤던 적이 있어서 저 자갈길을 싫어한다." 우리가 몰라서 오해했을 뿐, 세상에 나쁜 말은 없었다.
김 PD는 스노우의 목욕도 직접 시켰다. 거품을 풍성하게 낸 다음 꼬리를 감겨 주고 물기를 제거한 뒤 강한 바람으로 드라이해 주는 과정을 거쳤다. 밭을 굴러 꼬질꼬질했던 모습이 싹 사라지고 말끔하게 변신한 스노우. 탄탄한 근육질 몸매에 윤기까지 더해져 깔끔하고 댄디한 스타일로 완성됐다.
발굽 정리도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말의 숲에서는 편자를 일부러 다 뺀다. "말발굽은 한 달에 0.8cm가 자란다. 편자는 자라는 속도보다 닳는 속도가 빠른 경주마나 매일 사람을 태우는 말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튀어나온 발굽이 돌에 부딪혀 깨지는 부분만 정리해 준다.
김 PD는 "처음 해보는 일인데 스노우가 허락해 줘서 만질 수 있었다. 이 말이 특별하게 나를 받아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베테랑은 "PD님은 일은 너무 잘하는데 스킨십이 부족하다. 올 때마다 안아주고 각인을 시켜야 하는데 일만 하면 말들도 일만 시키는 사람으로 기억한다"고 조언했다.
말의 숲은 지난해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방목생태축산농장' 인증을 받았다. 김 씨는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 초지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앞으로 학교나 청소년, 사회적 약자들, 장애우들에게도 홀스테라피(말을 활용한 치유 프로그램)로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가족과 함께 찾은 여성은 "도시 생활에 찌들어 있었는데 한적한 곳에서 동물들과 함께하니 잡념이 다 사라지고 편안함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주말마다 봉사 활동을 하러 오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도 있다. 처음에는 엄마 때문에 왔지만 너무 좋아서 이제는 스스로 찾아온다. "힘들긴 하지만 말들과 있을 때 힐링을 받는다. 공부와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말들과 있으니 좋다.“
국내에서는 연간 1800마리의 경주마가 생산되고, 그중 1400마리가 사라진다. 김 씨는 "퇴역 경주마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몇 마리씩 입양했다. 버려지는 말들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말들은 사람의 손길을 받고 사람은 말들의 온기를 느끼는 의미 있는 곳을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를 향해 달려오는 말들을 보면 반려동물이 더 반가울 때가 있다는 말이 실감된다. 말들이 한 마리씩 늘어날 때마다 힘들기보다는 새로운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는다. 그만큼 책임도 늘지만 모든 말들에게서 그런 에너지를 받을 수 있어서 계속 지속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때는 쓰임을 다하고 누군가에게 버려졌지만 이제는 사람과 함께 걷고 함께 느끼며 새롭게 시작하는 말들. 말과 사람 그리고 자연이 연결돼 하나가 되는 곳. 이곳은 버려지는 말들의 안식처 '말의 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