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역 배우 접고 회사원 꿈꾸던 안성기가 영화판에 다시 뛰어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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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산화로 전공 무용지물

안성기는 6살에 연기를 시작했고, 8살에는 김기영 감독의 영화 '10대의 반항'에서 소매치기 역으로 출연해 그해 문교부 우수국산영화상 소년연기상과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소년특별연기상을 받을 만큼 일찍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아역 스타는 성인 배우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통념이 강했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그는 배우를 평생 직업으로 삼는 데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서울 동성고에 재학하던 시절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때였다. 큰형의 참전 영향까지 겹치며 베트남에 진출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고 한다. 결국 대학도 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과를 택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베트남전 파병과 맞물려 베트남어를 ‘실용적인 외국어’로 보는 시선이 있었고, 전공을 살려 기업에 취직해 회사원으로 살아가겠다는 계획도 자연스럽게 세워졌다. 연기 경력이 있기는 했지만, 영화판이 불안정하다는 현실적 판단도 작용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국제 정세 변화가 그의 인생 항로를 바꿔놓았다.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되면서 그가 공들여 배운 베트남어가 한순간에 쓸모없게 된 것이다.
사실 대학 졸업하면 거의 취직이 보장되던 시절이라 한국외대 나온 장교 출신이 정말 일자리가 없었을 리는 없다. 그보다는 베트남어 전공을 잘 살릴만한 마음에 맞는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고 보는 게 맞다.
아역 스타 출신은 성인 배우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고정 관념이 지배하던 시대였지만 그는 우려와 달리 영화 '바람불어 좋은 날'을 기점으로 충무로에 성공적으로 복귀했고, 이후 연이어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1980~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남자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배창호, 이장호 등 1980년대를 대표한 감독들의 작품에서 주연을 맡아 흥행과 작품성을 동시에 챙기며 배우로서의 가치를 높였다. 당대 주요 여배우들의 상당수가 안성기와 스크린에서 호흡을 맞췄다는 점도 그의 위상을 보여준다.
아역으로 이름을 알린 뒤 곧장 배우 생활을 이어간 것이 아니라, 고등학교·대학교·군 복무 시절 10여 년 공백을 거치며 아역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탈색된 것도 성인 배우로 안착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돌이켜 보면 베트남 공산화라는 역사적 사건이 결과적으로 한국 영화계에 '국민배우'를 선물한 셈이다. 만약 당시 베트남 정세가 달랐다면, 안성기는 무역회사의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