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00억 할리우드 대작 꺾고 '역주행 신화' 쓰며 이변 기록한 한국영화
2026-01-15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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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극장가 첫 이변으로 기록된 한국영화
연말 극장가를 뜨겁게 달궜던 '아바타: 불과 재'의 기세를 한국 영화가 꺾었다. 1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한 건 다름 아닌 한국 멜로영화 '만약에 우리'였다. 화려한 스케일과 압도적 자본으로 무장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제치고, 110분짜리 조촐한 멜로영화가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은 2026년 극장가 첫 이변으로 기록됐다. 
14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 '만약에 우리'는 누적 관객 120만 7536명을 동원하며 당일 기준 일별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개봉 15일 만의 성과다. 이날 하루 동안 5만 2687명이 영화를 관람했으며, 당일 매출액은 5억 653만원에 달했다. 개봉 초반 조용했던 출발과 비교하면 놀라운 반전이다.
지난달 31일 개봉한 '만약에 우리'는 초반 흥행 성적이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개봉일 기준 예매 관객수는 11만 8000여 명 수준이었다. 당시 극장가는 약 4억 달러(약 5874억원)의 제작비를 쏟아부은 '아바타: 불과 재'가 압도적 점유율로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었고, 멜로 장르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은 냉랭했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멜로영화는 극장가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블록버스터 액션과 판타지 장르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멜로는 '소수의 취향'으로 밀려나 있었다.

개봉 2주 차에 접어들며 분위기가 달라졌다. '만약에 우리'는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관객을 끌어모았다. 지난 9~11일 주말 3일간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아바타: 불과 재'를 제쳤다. 개봉 12일 차인 지난 11일에는 누적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고, 다음 날인 12일에는 손익분기점인 110만 명을 넘어섰다.
이는 2022년 6월 개봉해 최종 191만 명을 동원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이후 최근 3~4년간 개봉한 한국 멜로영화 중 가장 높은 흥행 성적이다. 그동안 극장가에서 멜로 장르가 얼마나 고전했는지를 감안하면, '만약에 우리'의 성과는 더욱 주목할 만하다.
'만약에 우리'는 20대 시절 뜨겁게 사랑했던 은호와 정원이 10년 만에 우연히 재회하며 벌어지는 일을 담은 현실 공감형 로맨스다. 2008년을 배경으로, 고향에서 서울로 상경해 꿈을 좇던 두 청춘이 사랑에 빠졌다가 현실의 벽 앞에 헤어지는 과정을 그렸다. 영화는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만난 두 사람이 과거를 돌아보며 "만약에 우리..."라는 질문을 던지는 구조로 전개된다.
김도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염문경과 김하나가 각본을 맡았다. 원작인 중국영화 '먼 훗날 우리'를 한국 정서에 맞게 재해석했다. 촬영은 2024년 4월 22일부터 6월 27일까지 진행됐으며, 제작비 대비 손익분기점은 110만 명으로 책정됐다. 배급은 쇼박스가 맡았고, 상영시간은 115분,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영화의 흥행 동력은 단연 '공감'이다. 관객들은 은호와 정원의 관계에서 자신의 과거, 혹은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하며 자연스럽게 감정 이입했다. 청춘 시절 빛나던 순간, 현실 앞에서 무너진 꿈,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미련. 이 모든 감정이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2008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현재 30대 중후반 관객들에게 강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삼포세대라는 말이 나오던 시기, 미래를 불안해하던 청년들의 모습이 현재를 사는 관객들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구교환과 문가영의 연기 역시 흥행의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구교환은 은호 역을 맡아 후회와 미련, 체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게임 개발로 100억 원을 벌겠다는 꿈을 품고 상경했지만 현실에 부딪혀 좌절하는 청년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문가영 역시 정원이 지닌 복합적인 감정의 결을 차분하게 쌓아 올렸다. 장학금을 위해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지만 마음속엔 건축가의 꿈을 간직한 인물, 내 집 마련이라는 현실적 목표와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관객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김도영 감독은 캐스팅 과정에서 구교환을 은호 역에 강력히 추천했다고 밝혔다. 감독의 선택은 적중했다. 구교환은 이번 작품을 통해 '믿고 보는 배우'라는 타이틀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문가영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두 배우의 호흡은 영화 전반에 걸쳐 자연스럽고 진정성 있게 펼쳐졌다.

영화계 관계자들은 '만약에 우리'의 흥행 요인을 분석하며 몇 가지 키워드를 제시했다. 첫째는 공감 가능한 이야기 구조다. 관객 각자가 다른 지점에서 공감할 수 있도록 설계된 서사가 주효했다는 평가다. 둘째는 현실적인 이야기 라인이다. 억지스러운 감정 소비를 요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담담히 그려냈다는 점이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셋째는 배우들의 연기력이다. 구교환과 문가영이 보여준 섬세한 감정 표현이 영화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만약에 우리'의 역주행은 현재 극장가의 지형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거대한 자본과 화려한 스펙터클이 흥행의 필수 조건처럼 여겨지는 시대, 결국 관객을 움직이는 건 '이야기'와 '공감'이라는 사실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블록버스터가 아니어도, 멜로 장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잘 만든 이야기는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특히 멜로 장르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확인시켰다는 데 의의가 크다. 최근 몇 년간 멜로영화는 극장가에서 찬밥 신세였다. 관객들의 관심은 액션과 판타지, SF로 쏠렸고, 멜로는 OTT 플랫폼에서나 소비되는 장르로 전락했다. 하지만 '만약에 우리'는 이런 흐름에 균열을 냈다. 멜로가 여전히 극장에서 통할 수 있고, 제대로 만들면 흥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영화는 왓챠피디아에서 별점 3.5점, 키노라이츠에서 지수 92.65%와 별점 3.5점, CGV에서 지수 98%를 기록하며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평론가들 역시 긍정적인 평가를 내놨다. 씨네21의 남선우 평론가는 "한때 나의 집이 돼준 사람에게 묻는 안부"라며 별 3개를 줬고, 조현나 평론가는 "안고 갈 추억으로 남길 수 있다면"이라며 별 3.5개를 줬다. 유선아 평론가는 "소중했던 시절 인연에 흘려보내는 좋은 안녕"이라며 별 3.5개를 매겼다.
조용히 출발해 묵직하게 도착한 '만약에 우리'는 단순한 흥행 기록을 넘어, 2026년 극장가에 던지는 메시지로 남게 됐다. 거대 자본과 화려한 볼거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 결국 관객은 진정성 있는 이야기에 반응한다는 것. 개봉 15일 만에 120만 관객을 넘어선 이 영화가 앞으로 어디까지 달려갈지, 그리고 멜로 장르의 부활 신호탄이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