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을 둘러싼 비극… ‘왕사남’ 보고 나면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지’
2026-02-18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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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 유배지의 고요를 걷다
한적한 풍경과 역사를 함께 즐기며 여행하기 좋은 곳이 있다.

바로 강원도 영월이다. 한적한 풍경과 함께 오래된 이야기를 따라 걷는 여행지를 찾고 있다면 강원도 영월이 눈에 띈다. 최근 공개된 사극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주목받으면서 단종의 유배지였던 영월의 공간들이 다시 한 번 이야기의 무대로 소환되고 있다.
계유정난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어린 왕 이홍위(단종) 그리고 그를 지켜보며 함께 살아가야 했던 산골 마을 촌장 엄흥도는 교과서 속 역사에서 한 발 더 들어간 ‘사람의 이야기’로 영월을 다시 보게 만든다. 단순히 풍경을 감상하는 여행을 넘어 영화의 서사를 따라 걷듯 역사를 체험하는 여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영월은 지금 더욱 주목받는 여행지가 되고 있다.
영월은 기차로 여행할 때 분위기가 더 잘 살아난다. 청량리에서 출발해 산과 강을 끼고 천천히 들어가는 구간은 속도가 자주 늦춰지고 굽은 구간이 많아 이동만으로도 ‘길이 멀고 험했다’는 인상을 남긴다. 창밖으로 이어지는 산하를 보고 있으면 단종이 영월로 향하던 유배길이 얼마나 멀었을지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도착 후에 골목과 강가를 천천히 걸으며 여행을 시작하면 기차가 만든 느린 흐름이 영월의 이야기와 맞물려 여행의 몰입도를 높여준다.
◈ 서부시장, 장릉으로 향하기 전의 일상 풍경
영월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들러볼 만한 곳은 서부시장이다. 시장 안에는 전병, 올챙이국, 메밀묵 등 지역 특산 음식이 즐비해 있고, 겨울철에는 따뜻한 음식이 여행의 시작을 부드럽게 열어준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속에서 광천골 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던 소박한 일상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골목마다 자리한 작은 가게들을 하나씩 둘러보다 보면, 화려한 궁궐과는 다른 조선의 민초들이 살아가던 삶의 결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얇고 쫄깃한 메밀 반죽 안에 속을 채워 즉석에서 구워내는 전병, 담백한 국물로 몸을 데워주는 올챙이국은 유배지로 향하기 전의 든든한 한 끼가 되어준다.
시장 구경을 마친 뒤에는 자연스럽게 영월의 역사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어 서부시장은 영화 서사의 프롤로그 같은 역할을 한다.
◈ 장릉, 왕위에서 쫓겨난 이후의 시간
다음 코스는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능, 영월 장릉이다. 서부시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장릉은 왕에서 죄인으로 신분이 바뀐 단종의 마지막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다. 영화 속 이홍위가 더 이상 왕이 아닌 존재로 살아가야 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능역을 걷다 보면 공간이 주는 무게감이 다르게 느껴진다.

영월의 장릉은 조선왕릉 가운데에서도 유독 특이한 위치에 놓여 있다. ‘장릉’이라는 능호는 조선왕릉에서 세 차례 사용됐지만, 영월 장릉은 장중할 장(莊) 자를 쓰며, 서울이나 경기도가 아닌 지방에 자리한 유일한 왕릉이다. 이는 단종이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된 뒤 영월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 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단종이 사망한 뒤 그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고 이를 지역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몰래 수습해 동을지산 자락에 암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세조의 눈을 피해 장례를 치러야 했던 탓에 무덤은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한동안은 ‘능’이 아닌 ‘묘’로 남아 있었다. 이후 숙종 대에 이르러 단종이 복위되면서 무덤 역시 왕릉으로 격상됐고, 이때 비로소 장릉이라는 능호를 얻게 됐다.

능역 입구에는 단종의 생애를 정리한 단종역사관과 함께, 그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와 묘소를 찾아 정비한 영월군수 박충원의 행적을 기리는 시설들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정자각 앞에는 계유정난과 사육신 사건 당시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위패를 모신 공간도 있어 다른 조선왕릉에서는 보기 힘든 구성을 이룬다.
장릉의 봉분과 석물 역시 비교적 간소하다. 병풍석과 난간석이 생략돼 있고 무인석이 없는 점도 특징인데 이는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의 삶과 겹쳐 해석되곤 한다. 화려함 대신 절제된 형식은, 단종의 비극적인 생애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능 앞에는 정순왕후의 사릉에서 옮겨온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생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두 사람을 사후라도 이어주자는 뜻에서 옮겨 심은 이 소나무는, 장릉을 찾는 이들에게 단종의 이야기를 한층 더 선명하게 전하는 상징물로 남아 있다.

◈ 청령포, 단종 유배의 흔적을 따라 걷다
장릉 다음으로 향할 곳은 청령포다. 강으로 둘러싸인 섬 형태의 지형인 청령포는 단종이 사실상 유배 생활을 보냈던 공간이자 왕과 사는 남자의 주요 무대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만 닿을 수 있는 구조는 외부와 단절된 고립감을 그대로 전한다.
영화 속에서는 광천골 촌장 엄흥도가 마을을 살리기 위해 유배지를 만들려다 예상치 못하게 왕 이홍위를 맞이하게 되는 과정이 그려진다. 실제 청령포를 걷다 보면 그 설정이 과장이 아니라 현실에 가까웠다는 점을 체감하게 된다. 유배 당시 머물렀던 터와 강변 지형, 둘러싼 산세는 어린 왕이 느꼈을 답답함과 외로움을 상상하게 만든다.

청령포 곳곳에는 단종의 흔적이 남아 있다. 유배 당시 머물렀던 공간과 주변 건물, 그리고 강변의 지형은 당시 생활상을 짐작하게 한다. 단순한 역사적 유적이 아니라 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이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고립감 속에서 방문객들은 어린 나이에 유배되어 생을 마친 단종의 고단했던 삶을 보다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다.

◈ 동강, 겨울 자연과 사색의 시간
청령포를 둘러본 후에는 영월의 또 다른 자연 명소, 동강으로 발길을 옮길 수 있다. 동강은 맑고 푸른 물줄기가 산과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강으로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겨울철에는 주변 산자락과 어울려 한층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단종 유배지의 묵직한 역사적 분위기와 맞물려 색다른 감각을 선사한다.

동강은 단순한 자연 경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강 주변에는 래프팅, 카약 등 수상 레포츠가 가능한 구간이 있어 여름철에는 모험적인 체험도 가능하지만 겨울철에는 고요한 강과 산의 조화가 여행객에게 사색의 시간을 제공한다. 특히 강줄기를 따라 천천히 산책하거나 다리를 건너며 바라보는 경치는 영월 여행의 여정을 마무리하기 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장소가 된다.

역사와 자연 그리고 체험이 이어지는 영월 여행에서 동강은 단종 관련 유적지와 시가지 풍경을 연결해 주는 매개 역할을 한다. 강물 위로 드리운 겨울 햇살과 산자락의 그림자가 어우러진 모습은 단순한 사진 이상의 여행 기록을 남기게 한다. 영월 여행에서 청령포의 역사적 의미를 느낀 뒤, 동강에서 자연의 여유를 즐기는 순서는 많은 여행자들이 추천하는 코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