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평] 유전무죄. 무전유죄.
2026-03-25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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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선별 통항' 정책, 호르무즈 해협을 정치적 협상 도구로
유전무죄 무전유죄, 전 세계 원유의 20%가 지나는 해협의 비정상적 질서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항 기준을 재정의하며 ‘선별 통항’ 방침을 공식화했다. 미국·이스라엘과 연계되지 않은 ‘비적대적 선박’에 한해 이란 당국과 사전 조율을 거치면 통과를 허용하겠다는 입장을 국제해사기구(IMO) 회원국들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전달한 것이다. 전면 봉쇄 대신 조건부 개방을 택했지만, 해협 통제권을 사실상 쥔 채 정치적 기준을 명문화했다는 점에서 파장은 적지 않다.
로이터통신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이란은 서한에서 “침략국과 그 지원 세력이 호르무즈 해협을 적대 행위에 활용하지 못하도록 필요하고 비례적인 조치를 취했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이스라엘은 물론 “침략에 가담한 다른 국가와 연계된 선박 역시 무해통항 대상이 아니다”라고 적시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대응을 넘어, 통항의 자격을 정치적 관계에 따라 구분하겠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 물동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전략적 요충지다. 전쟁 발발 이후 통항 차질이 이어지면서 현재 걸프 해역에는 약 3,200척의 선박이 발이 묶여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 선박은 공격을 받았고, 국제 유가와 해상 운임은 출렁이고 있다. 에너지 시장은 다시 한 번 지정학적 리스크의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형식상 해협은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란의 승인 없이는 통과가 쉽지 않다는 것이 해운업계의 분석이다. 선박 추적 데이터에 따르면 이란은 자국 영해 내 특정 항로를 통해 소수 선박만 제한적으로 이동시키고 있으며, 통과 여부는 철저한 검증을 거쳐 결정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 논란이 되는 부분은 ‘안전 보장 대가’다. FT는 일부 선박이 통항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최대 200만 달러를 지불했다고 보도했다. 사실이라면, 국제법상 보장된 무해통항의 원칙이 현실에서는 비용과 정치적 분류에 의해 가려지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전 세계 원유의 20%가 지나는 해협에서, 통과 여부가 ‘정치적 적대성’과 ‘안전 보장 비용’에 따라 갈린다면, 그 현실은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유전무죄(油錢無罪), 무전유죄. 기름이 흐르는 바다 위에서조차, 통과의 권리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역설이다.
이란 의회는 전쟁 이후에도 해협 통항을 제도적으로 규제하는 새로운 법안을 준비 중이다. 미국 제재에 동참한 국가에 대한 상응 조치와 결제 통화 전환 방안까지 거론된다. 이는 해협을 단순한 군사적 카드가 아니라 장기적인 경제·외교 협상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유엔 산하 IMO는 긴급회의를 열어 인도주의적 통로 개설 방안을 논의 중이며, 바레인은 해협 개방을 촉구하는 안보리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란이 통항의 조건을 스스로 설정하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 한, 호르무즈 해협은 ‘열려 있으되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 않은’ 해상 관문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이번 조치는 전면 봉쇄와 자유 통항 사이의 회색지대를 만들어냈다. 해협은 여전히 세계 에너지의 동맥이지만, 그 동맥을 지나는 혈류는 이제 정치와 비용이라는 이중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