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왜 한국인이 표적이 되나”…필리핀 범죄, 우발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2026-04-24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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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도 피해 신고해도 현장 확인조차 안해…피해자에게 ‘증거’를 요구한 경찰
- 수사 공백과 단기 체류 구조가 만든 불신…한국인 관광객 보호 대책 다시 봐야

위키트리부산경남취재본부장 / 사진=위키트리DB
위키트리부산경남취재본부장 / 사진=위키트리DB

[전국=위키트리 최학봉 선임기자] 범죄는 우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유형의 피해가 반복되고, 사건 이후 수사와 처벌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단순한 치안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필리핀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한 강도, 절도, 납치, 총격 사건은 잊을 만하면 반복되고 있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조심해야 한다”는 말은 나오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왜 한국인이 계속 범죄의 표적이 되는가.

기자가 직접 겪은 사건은 이 의문을 더 분명하게 만들었다. 필리핀 현지에서 강도를 당해 달러와 페소, 귀중품을 빼앗긴 뒤 경찰에 신고했지만, 기대했던 현장 확인이나 적극적인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피해 현장을 찾아와 확인하기는커녕, 경찰은 피해자에게 귀중품을 털렸다는 증거를 가져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강도를 당한 피해자에게 스스로 피해 입증 자료를 가져오라는 말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 순간 피해자는 보호받는 사람이 아니라, 범죄 사실을 혼자 증명해야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 느낀 것은 단순한 행정 지연이 아니었다. 피해자 보호보다 절차와 책임 회피가 앞서는 듯한 태도, 사건을 끝까지 추적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 대응은 깊은 불신을 남겼다. 피해자가 체감한 것은 무능을 넘어선 구조적 방치였다.

신고해도 끝까지 가지 않는 사건…범죄자는 그 공백을 계산한다

한국인 관광객은 대부분 단기간 머물다 귀국한다. 사건이 발생해도 피해자가 현지에 오래 남아 진술을 이어가고, 수사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재판 절차까지 따라가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 구조는 범죄자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잡혀도 끝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피해자는 결국 돌아간다.” “신고해도 수사는 흐지부지될 수 있다.”

이런 인식이 현지 범죄 환경에 자리 잡는다면, 한국인 관광객은 더 쉬운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범죄는 순간적으로 벌어지지만, 표적은 계산 속에서 정해진다. 돈은 있어 보이고, 언어는 통하지 않으며, 일정이 끝나면 귀국하는 사람. 범죄자 입장에서 이보다 부담이 낮은 대상은 많지 않다.

물론 모든 필리핀 지역이 위험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모든 현지 경찰이 소극적이라고 일반화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피해자가 직접 겪은 현실과 교민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불신은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저항하지 말라” 이후가 없다면, 보호는 절반에 그친다

외교당국은 해외에서 강도 피해를 당할 경우 저항하지 말고 신속히 벗어나라고 안내한다. 맞는 말이다. 생명이 우선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피해자가 살아남은 뒤, 누가 사건을 끝까지 따라가나. 현지 경찰이 움직이지 않을 때 누가 압박하나. 피해자가 귀국한 뒤에도 수사와 처벌이 이어지도록 누가 책임지고 관리하나.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조심하라”는 말은 절반짜리 대책에 그친다. 범죄 예방도 중요하지만, 범죄 이후의 수사와 처벌이 작동해야 다음 범죄를 막을 수 있다. 처벌 가능성이 낮다고 인식되는 순간, 범죄자는 다시 같은 대상을 고른다.

필리핀에서 한국인 관광객 피해가 반복되는 이유를 단순히 개인 부주의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 문제는 현지 치안, 수사 공백, 외교적 한계, 단기 체류 구조가 맞물린 데 있다.

한국인이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우려는 과장이 아니라 경고에 가깝다. 사건이 발생해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구조, 피해자가 증거까지 떠안아야 하는 현실, 귀국과 함께 약해지는 수사 동력. 이 모든 것이 쌓이면 범죄자에게는 하나의 계산식이 된다.

범죄는 우발처럼 보이지만, 표적은 반복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제 필요한 것은 막연한 여행 주의가 아니다. 한국인 관광객 대상 강력범죄에 대해 사건 이후까지 추적하는 외교·수사 공조 체계, 피해자 진술 보전 장치, 현지 경찰 대응에 대한 실질적 점검이 필요하다.

피해자는 강도를 당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다. 그런데 수사 과정에서 다시 한 번 방치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피해다.

필리핀 여행을 낭만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여행 홍보가 아니라 위험 관리다. 그리고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왜 한국인이 계속 표적이 되는가.

home 최학봉 기자 hb7070@wikitr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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