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곡] 붕괴 이후에도 남은 온기... 그 기이한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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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리추얼라이즈드의 ‘메인라인 송’을 듣다
상처 입은 인간이 끝내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방식

스피리추얼라이즈드의 리더 제이슨 피어스. 2001년 앨범 홍보 이미지를 촬영했을 때 찍힌 것이다.
스피리추얼라이즈드의 리더 제이슨 피어스. 2001년 앨범 홍보 이미지를 촬영했을 때 찍힌 것이다.

브리티시 록의 역사는 언제나 ‘움직임’의 역사였다. 1960년대의 사이키델릭, 1970년대의 프로그레시브와 펑크, 1980년대의 포스트펑크와 맨체스터 신, 그리고 1990년대 브릿팝까지. 영국 록은 시대마다 새로운 유행과 태도를 만들어냈고, 대중은 늘 다음 장면을 기다렸다. 이렇게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이상할 정도로 혼자 다른 방향을 바라본 인물이 있다. 스피리추얼라이즈드의 리더인 제이슨 피어스가 바로 뮤지션이다.

스피리추얼라이즈드의 ‘메인라인 송(Mainline Song)’을 듣고 있으면 묘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이 곡은 새롭다기보다 오래된 것처럼 들린다. 동시에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 마치 수십 년 동안 같은 밤거리를 떠돌던 사람이 이제야 그 풍경을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듯한 음악이다.
‘메인라인 송(Mainline Song)’이 실린 스피리추얼라이즈드의 앨범.
‘메인라인 송(Mainline Song)’이 실린 스피리추얼라이즈드의 앨범.

이 곡은 2022년 발표된 스피리추얼라이즈드의 앨범 ‘에브리씽 워즈 뷰티풀(Everything Was Beautiful)’에 수록됐다. 스피리추얼라이즈드가 데뷔한 지 이미 30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이미 자기복제에 빠졌거나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다 정체성을 잃기 쉬운 시간이다. 그러나 '메인라인 송'에는 그런 퇴색의 기미가 거의 없다. 젊은 날의 스피리추얼라이즈드와 분명 이어져 있으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다른 정서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놀랍다. 그 차이를 이해하려면 제이슨 피어스라는 인물을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스피리추얼라이즈드의 출발점에는 스페이스맨 3가 있다. 1980년대 후반 영국 인디 신에서 등장한 이 밴드는 록 음악의 전통적인 문법을 거의 해체하다시피 했다. 몇 개 되지 않는 코드, 끝없이 반복되는 리프, 드론과 노이즈, 극단적인 미니멀리즘. 당시 영국 음악계가 점점 화려함과 즉각적인 쾌감으로 향할 때 스페이스멘 3는 오히려 같은 자리를 맴돌며 청자의 의식을 흔들려 했다. 그들은 청자로 하여금 음악을 듣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에 잠기게 만들길 바랐다. 그리고 스피리추얼라이즈드는 피어스의 이 같은 실험이 인간적인 감정과 만났을 때 탄생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제이슨 피어스의 삶은 늘 위태로웠다. 약물 중독, 육체적 쇠약, 반복되는 우울, 관계의 붕괴. 특히 스피리추얼라이즈드의 동료이자 연인이었던 케이트 래드리와의 파국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케이트는 사실혼 관계였던 피어스 몰래 남자를 만났다(훗날 둘은 결혼했다). 그가 바로 더 버브의 리처드 애시크로프트였다. 이 일은 피어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그 고통을 단순한 복수심이나 자기연민으로 소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그것을 거의 종교적인 차원의 음악으로 바꿔버렸다.

그 결정체가 1997년 발표된 ‘레이디스 앤 젠틀맨 위 아 플로팅 인 스페이스(Ladies and Gentlemen We Are Floating in Space)’다.

이 앨범은 브릿팝 시대의 명반이 아니다. 오히려 브릿팝이라는 흐름 자체와 일정한 거리를 둔 작품에 가깝다. 당시 영국 음악계는 오아시스, 블러, 펄프 등을 중심으로 ‘쿨 브리타니아’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거리 문화와 노동계급의 자의식, 스타성, 캐치한 멜로디가 시대를 지배했다. 하지만 제이슨 피어스는 그 모든 열광에서 한 발 떨어져 있었다. 그는 현실의 거리 대신 우주와 병실, 사랑과 약물, 구원과 붕괴를 노래했다.

그래서 ‘레이디스 앤 젠틀맨 위 아 플로팅 인 스페이스’는 지금 들어도 시대성이 옅다. 대신 인간 존재의 가장 밑바닥에 닿아 있다. 거대한 스트링과 가스펠 코러스, 드론과 노이즈가 뒤엉키는 사운드는 황홀하지만, 그 중심에는 처절할 정도로 연약한 인간이 있다. “All I want in life’s a little bit of love to take the pain away.” 삶에서 원하는 건 단지 고통을 잠시 덜어줄 약간의 사랑뿐이라는 이 문장은 스피리추얼라이즈드의 세계 전체를 압축한다.

중요한 것은 이 시기의 피어스가 ‘지금 막 무너지고 있는 사람’처럼 들린다는 점이다. 그의 음악에는 자기파괴 직전의 황홀과 절망이 공존한다. 아름답지만 위험하고, 숭고하지만 붕괴 직전이다. 마치 끝없이 추락하면서도 동시에 빛을 보는 듯한 느낌이 음악에 담겼다. 그런데 '메인라인 송'에 이르러 이런 분위기가 달라진다.

2022년의 제이슨 피어스는 더 이상 젊은 시절의 방황 속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는 실제로 죽음 가까이까지 갔던 인물이다. 폐렴 합병증으로 중환자실에 실려갔고, 산소호흡기에 의존해야 했으며, 긴 시간 육체적 붕괴를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메인라인 송'을 만들었다. 그래서 '메인라인 송'은 무너져가는 사람의 음악이 아니라, 무너진 뒤에도 어떻게든 삶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의 음악처럼 들린다.

“Hush, keep your voices down.” 곡은 속삭이듯 시작된다. 모두가 잠든 도시, 조용한 밤,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 “오늘 밤 도시로 가지 않을래?”란 가사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그러나 이 반복은 점점 이상한 울림을 만든다. 그것은 단순한 외출의 제안이 아니다. 지금 있는 삶의 상태를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은 마음처럼 들리고,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보려는 몸짓처럼 들리며, 끝내 사라지지 않은 희미한 희망처럼 들린다.

특히 “There’s a change in the air around here”라는 구절은 '메인라인 송' 전체를 관통한다. 공기가 달라졌다는 말. 그것은 관계의 변화일 수도 있고, 삶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일 수도 있으며, 긴 고통 끝에 찾아온 미세한 회복의 기척일 수도 있다. 이 곡은 끝내 그 의미를 설명하진 않는다. 바로 그 여백이 스피리추얼라이즈드를 특별하게 만든다.

피어스는 감정을 직접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반복과 공간, 소음과 잔향으로 감정을 만든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머무르는 것에 가깝다. 듣는 사람은 어느 순간 자기 기억과 감정을 그 안에 흘려 넣게 된다. 젊은 날 들으면 자유와 낭만의 노래처럼 들리던 곡이, 시간이 지난 뒤에는 상실과 체념의 노래처럼 변한다.

무엇보다 '메인라인 송'이 놀라운 이유는, 후기작임에도 젊은 시절의 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예전의 스피리추얼라이즈드가 ‘황홀 속의 붕괴’를 노래했다면, '메인라인 송'은 ‘붕괴 이후에도 남아 있는 삶’을 노래한다. 그래서 이 곡에는 절망 대신 이상한 평온이 있다. 물론 여전히 쓸쓸하고 몽환적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처럼 자기 자신을 파괴 직전까지 밀어붙이는 느낌은 아니다. 오히려 긴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 겨우 얻어낸 체념과 다정함이 남아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스피리추얼라이즈드가 브리티시 록 역사 속에서도 유독 특별한 이유일 것이다.

많은 밴드들이 젊음의 에너지로 위대해진다. 그러나 스피리추얼라이즈드는 나이를 먹으며 더 깊어졌다. 그들의 음악은 더 이상 단순한 사이키델릭 록도, 슈게이즈도, 브릿팝의 변주도 아니다. 그것은 상처 입은 인간이 끝내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몸짓에 가깝다.

그래서 '메인라인 송'을 듣고 있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은 끝없이 무너지고 사라져가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오늘 밤 도시로 갈래?”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라고. 그리고 어쩌면 스피리추얼라이즈드의 음악은 바로 그 마지막 희미한 빛을 붙잡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이 한 곡’이라는 연재의 첫 문을 '메인라인 송'으로 연 이유다.

'메인라인 송'에는 좋은 음악이 오래 살아남는, 또는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응축돼 있다. 설명보다 여운을 남기는 태도, 절망 속에서도 완전히 빛을 놓지 않는 감정, 시간을 통과한 뒤에야 생겨나는 체념과 평온. 그리고 무엇보다 젊음의 순간적인 폭발이 아니라, 삶의 긴 시간을 지나온 뒤에도 여전히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깊이가 있다.

어떤 음악은 시대를 대표한다. 그러나 어떤 음악은 시대를 지나, 아니 시대를 넘어 인간의 감정 자체에 닿는다. '메인라인 송'은 후자에 가까운 노래다. 2022년에 발표된 곡이지만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음악처럼 들리고, 동시에 앞으로도 오래 남을 것처럼 들린다. 스피리추얼라이즈드가 유행이나 장르를 넘어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이 곡은 제이슨 피어스라는 인물이 수십 년 동안 반복해온 질문의 연장선에 있다. 사랑은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면서 동시에 무너뜨리는가. 삶은 왜 이렇게 쉽게 붕괴하면서도 끝내 완전히 꺼지지 않는가. 그리고 인간은 왜 다시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려 하는가. 젊은 시절의 스피리추얼라이즈드가 그 질문을 자기파괴적인 황홀 속에서 던졌다면, '메인라인 송'은 모든 붕괴 이후에도 남아 있는 희미한 온기로 그 질문을 이어간다.

'메인라인 송'은 밴드의 단순한 후기 명곡이 아니다. 긴 시간을 지나온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온기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무너진 뒤의 삶까지 포용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듣고 있으면 어느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밀려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좋은 음악은 단순히 한 시대를 소비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인간 안에 남아 있는 감정들을 다시 흔들어 깨운다. '메인라인 송'은 바로 그런 노래다.

뮤직비디오 속 열차는 어쩌면 피어스 자신의 삶처럼 보인다. 흔들리고 삐걱거리면서도 끝내 어딘가를 향해 계속 나아간다. 이미 수없이 무너졌고 너무 많은 걸 잃었음에도 완전히 멈춰 서지는 못하는 사람처럼. 그 움직임이 이상할 만큼 사람 마음을 건드린다.



home 채석원 기자 jdtimes@wikitr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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