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 직원들, 투표용지 보관할 곳 없다고 요청해 인쇄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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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대응 시스템 완전 마비, 수시간 방치된 투표 혼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6·3 지방선거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배경에 대해 자체 진상조사를 진행 중인 가운데, 투표용지 인쇄량 축소 결정의 배경에 선관위 내부의 '보관 공간 부족'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외부 연구용역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를 바탕으로 투표용지 인쇄 기준이 완화됐고, 이후 실제 선거 현장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하면서 선거관리 체계 전반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15일 국민의힘 김은혜 의원실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행정연구원은 지난 2022년 12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선거 절차사무 개선 방안' 연구용역 보고서를 제출했다. 해당 연구는 이른바 '소쿠리 투표' 논란이 발생한 2022년 대통령선거 이후 선거관리 절차를 점검하고 개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추진됐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반발한 시민들이 9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 설치된 개표소 앞에서 재선거를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6.6.9/뉴스1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반발한 시민들이 9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 설치된 개표소 앞에서 재선거를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6.6.9/뉴스1

연구진은 전국 선관위 직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심층 인터뷰를 실시했으며, 현장에서 제기된 다양한 의견을 보고서에 담았다. 이 과정에서 일부 선관위 직원들은 선거일에 사용할 투표용지를 각 투표소에 배부하기 전까지 보관할 공간이 부족하다는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는 "선거일 투표용지 인쇄량을 축소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이 포함됐다. 연구진은 그 근거로 과거 선거에서 상당수의 투표용지가 사용되지 못한 채 폐기됐다는 점을 들었다. 여기에 더해 일부 구·시·군 선관위에서는 투표용지를 안전하게 보관할 공간이 부족해 회의실 등에 임시 보관하는 사례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보안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결국 중앙선관위는 연구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지난해 절차사무개선 태스크포스(TF)를 운영했고, 허철훈 당시 사무총장의 전결을 통해 투표용지 인쇄 기준을 기존 '예상 투표자 수의 60% 이상'에서 '50% 이상'으로 낮췄다.

문제는 이러한 기준 변경 과정에서 현장 우려가 제기됐음에도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는 개표소 봉쇄 시위가 12일째 이어진 16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서 경찰이 이동하고 있다. 2026.6.16/뉴스1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는 개표소 봉쇄 시위가 12일째 이어진 16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서 경찰이 이동하고 있다. 2026.6.16/뉴스1

울산시선관위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지역의 경우 사전투표율이 상대적으로 낮을 수 있으며, 이 경우 선거일 투표 수요가 집중돼 투표용지가 부족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최종 결정 과정에서 채택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인쇄량 감축 결정 이후 실시된 6·3 지방선거에서는 서울 송파구 일부 투표소에서 실제로 투표용지가 부족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유권자들이 장시간 대기하거나 투표에 차질을 빚는 상황이 벌어졌고, 선관위의 선거관리 능력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제기됐다.

연구용역 보고서에는 사전투표 운영 시간 조정과 관련된 내용도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부 선관위 직원들은 사전투표 시작 시간을 오전 6시에서 오전 8시로 늦추는 방안을 제안했다. 연구진은 보고서에서 "사전투표 기간에도 직원들이 투표 시작 2~3시간 전에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업무 부담이 크다는 의견이 다수 제기됐다고 설명했다.

또 "사전투표 시작 시간을 늦추는 방안에 대해서는 직원들 사이에 공통적인 공감대가 있었지만, 종료 시간을 늦추는 방안에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고 적시했다.

이는 사실상 현재 12시간 운영되는 사전투표를 10시간으로 줄이는 방안에 해당한다. 다만 중앙선관위는 해당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고, 실제 제도 변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중앙선관위는 보고서 내용에 대해 "연구용역 보고서는 외부 기관이 작성한 것으로 선관위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라고 설명하면서도, 투표용지 인쇄량 감축과 관련해서는 "결과적으로 타성에 젖은 판단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한편 중앙선관위 진상규명위원회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조사 결과도 공개했다.

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서울시선관위는 선거 당일 오전 11시 40분에서 50분 사이 송파구선관위로부터 투표용지 부족 상황을 보고받았음에도 이를 상급 기관에 즉시 보고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중앙선관위는 당일 오후 5시가 넘어서야 외부 민원을 통해 사태를 인지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실상 수 시간 동안 중앙선관위 차원의 위기 대응이 전혀 이뤄지지 못한 셈이다.

3일 오후 경북 포항시 남구 만인당에 마련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개표소에서 투표종사원들이 투표지를 분류하고 있다. 2026.6.3/뉴스1
3일 오후 경북 포항시 남구 만인당에 마련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개표소에서 투표종사원들이 투표지를 분류하고 있다. 2026.6.3/뉴스1

더욱이 서울시선관위 관계자들은 상황이 발생한 이후에도 예정돼 있던 사전투표소 현장점검과 개표소 점검 등 통상 업무를 계속 수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이에 대해 "위기 대응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고 평가하며 보고 체계와 상황 관리 체계 전반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행정 착오를 넘어 국민의 참정권과 직결되는 문제라는 점에서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유럽 순방 중인 이재명 대통령도 15일(현지시간) 이탈리아에서 열린 교민 간담회에서 관련 사안에 대해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행정적인 문제 때문에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라며 "최대한 빨리 해결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서는 올림픽공원 일대 시위대의 선관위 관련 시설 출입 통제 및 업무 방해 행위와 관련해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에 대해 행위자는 물론 공모자까지 엄중하게 수사하도록 경찰에 지시했다"고 밝혔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선관위의 선거관리 시스템과 위기 대응 체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투표용지 인쇄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결정 과정과 보고 체계의 작동 실패 여부가 향후 감사와 국회 차원의 조사에서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