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나무껍질에 그대로… 경주 여행 가면 꼭 들러야 할 뜻밖의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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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사색을 누릴 수 있는 국내 명소
영적인 기운이 소나무 한 그루마다 서려 있는 신비로운 공간이 있다. 빛과 안개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이곳은 어디일까? 바쁜 현대사회의 소음에서 벗어나 오직 나만의 고요한 사색을 누릴 수 있는 국내 명소를 소개한다.

경북 경주 배동에 자리한 삼릉숲이다. 세 개의 왕릉이 모여 있는 서남산 기슭의 솔숲을 뜻하는 삼릉숲은 사적 제219호로 지정됐다. 삼릉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 이사금,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해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세 왕 모두 박씨 성을 가진 군주라는 점이다. 신라는 박, 석, 김 삼성이 번갈아 왕위를 계승했는데, 신라 유민들이 신성하게 여겼던 남산의 서쪽 자락에는 박씨 왕들의 능이 주로 배치됐다.
삼릉숲을 지탱하는 소나무는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일반적인 소나무와 달리 온몸을 비틀며 구불구불하게 자라난 안강형 소나무다. 안강형 소나무는 경주 안강 지역에서 처음 관찰돼 이름 붙여진 것으로 알려졌다. 줄기가 굽고 여러 방향으로 휘어 자라며, 수관(나무의 가지와 잎이 달려 있는 부분)이 비교적 수평에 가깝게 보이는 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거북이 등껍질처럼 거칠게 갈라진 나무껍질이 세월의 흔적을 보여준다.
삼릉숲의 진가는 일교차가 큰 봄과 가을철 새벽녘에 드러난다. 땅에서부터 피어오른 짙은 안개가 솔숲 전체를 가득 메우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시기에 소나무 가지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아침 햇살이 비추면 마치 현실 세계가 아닌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신비롭게 변모한다.
숲을 따라 남산 정상인 금오봉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계곡 곳곳에 숨겨진 문화유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경주 남산은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노천 박물관으로 불리는데, 그중에서도 삼릉계곡은 가장 많은 불교 유적을 품고 있는 핵심 코스다. 산책로 초입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을 시작으로, 바위에 정교하게 새겨진 마애관음보살상과 선각육존불 등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삼릉숲은 경주 보문관광단지에서 멀지 않은 배동에 위치해 있다. 자차로 방문할 경우, 내비게이션에 ‘서남산 공영주차장’을 검색하면 되며, 주차 공간이 널찍하게 마련돼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이나 경주역 등 주요 거점에서 남산 방향으로 운행하는 시내버스를 탑승하면 15분 내외로 도착할 수 있다.

삼릉숲에서 발걸음을 옮겨 북쪽으로 걷다 보면 사적 제1호 경주 포석정지에 도달한다. 이곳은 역대 신라의 임금들과 귀족들이 모여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던 장소다. 당시 화려했던 전각들은 모두 사라지고 전복 모양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 수로만이 숲속에 외롭게 남아 있다.
포석정은 신라 역사의 가장 화려했던 번영의 순간과 가장 처절했던 몰락의 순간을 동시에 품고 있는 역설적인 공간이다. 제49대 헌강왕이 태평성대를 노래했던 낭만적인 공간인 동시에, 제55대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 군대의 기습을 받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며 왕조의 사실상 종말을 고했던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경주 탑동의 한적한 평야 위에는 다섯 개의 거대한 능이 실재한다. 사적 제172호로 지정된 경주 오릉은 화려한 도심 속 유적지와 달리 고대 국가의 태동기를 증언하는 성역이다. 단순한 무덤 군락을 넘어 신라의 뿌리가 깃든 역사적 공간이다.
오릉은 신라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진 박씨 성의 군주들과 왕비가 나란히 잠든 묘역이다. 신라를 건국한 제1대 박혁거세 거서간을 비롯해 제2대 남해 차차웅, 제3대 유리 이사금, 제5대 파사 이사금 등 네 명의 왕과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부인의 무덤이 모여 있다.
또 오릉 경내 남쪽에 위치한 숭덕전은 활자로만 존재하던 건국 서사를 물리적인 공간으로 연결하는 제전이다. 조선 영조 5년인 1729년에 박혁거세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건립됐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속에서도 훼손되지 않고 보존된 유서 깊은 사당이다.
오릉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되며, 입장료는 성인 2000원, 청소년 및 군인 1000원, 어린이 500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