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듣고도 즉각 배달 거절... 배달기사들이 치를 떠는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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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멧 벗고 신분증 내라고 요구하는 '천룡인 아파트'

배달 기사들 사이에서 출입 절차가 까다롭기로 소문난 아파트 단지를 모아 놓은 이른바 '천룡인 아파트 지도'가 온라인에서 다시 확산하고 있다.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배달 기사가 헬멧을 벗고 인적 사항을 적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요구를 받고 배달을 포기하는 과정을 담은 영상이 알려지면서 관련 논란에 다시 불이 붙었다.

'배달기사의 인권이나 개인정보가 배달료 2,200원보다 못한건가...헬멧까지 벗기는 천룡인 아파트를 다녀왔습니다'란 제목으로 '해운대주민'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을 캡처한 사진.
'배달기사의 인권이나 개인정보가 배달료 2,200원보다 못한건가...헬멧까지 벗기는 천룡인 아파트를 다녀왔습니다'란 제목으로 '해운대주민'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을 캡처한 사진.


문제의 영상은 유튜브 채널 '해운대주민'에 올라온 2분여 분량의 게시물이다. 배달 기사가 부산의 한 아파트를 찾았다가 보안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 담겼다. 보안 직원이 헬멧을 벗고 방문 기록에 인적 사항을 적어야 출입할 수 있다고 안내하 기사는 "다른 아파트에서는 개인정보를 적거나 헬멧을 벗으라는 요구를 받은 적이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기사는 보안 직원에게 입주민과 연결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직접 연락하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인적 사항을 적고 헬멧까지 벗으라고 해서 1층에 음식을 두겠다"고 하자 입주민은 "위로 올려 주셔야 한다. 원래 다 그렇게 한다"고 맞섰다.

기사가 "개인정보를 적으라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자 입주민은 "그러면 배달료를 받지 말라"고 했다. 기사가 "밑에서 위법을 저지르고 있다. 왜 개인정보를 남겨야 하느냐"고 반문하자 입주민은 "그러면 신고하라"고 응수했다. 결국 기사는 1층 보안실에 음식을 맡기고 자리를 떴다. 이후 배달 플랫폼 고객센터에 상황을 설명하자 센터는 사정을 고려해 배달료를 차감하지 않기로 했다.

'천룡인 아파트'는 만화 '원피스'에 등장하는 특권 계급 '천룡인'에서 따온 말이다. 배달 기사에게 과도한 출입 절차를 요구하거나 화물용 엘리베이터 이용, 도보 이동 등을 강제하는 일부 단지를 빗댄 표현이다. 배달 기사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공유하는 지도에는 서울 강남권을 비롯한 전국 수십 곳의 고가 단지가 표시돼 있다. 단지 안 오토바이 진입을 막아 정문에 세워 두고 걸어 들어가게 하거나 신분증 확인과 방명록 작성, 헬멧·소지품 보관, 화물용 엘리베이터 이용 등을 요구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기사들은 이런 정보를 지도 형태로 공유하며 주문을 받기 전에 미리 거른다.

별칭을 두고도 말이 오갔다. "천룡인이라는 이름은 신분이 높다는 인상을 주니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꼴값 아파트'가 맞는 표현"이라는 반응이 대표적이다. "스스로 특별한 신분인 줄 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으니 '해골 아파트'라고 부르자"는 비아냥도 나왔다.

영상을 본 배달 기사들은 이런 단지를 아예 피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 이용자는 "그런 곳은 절대 콜을 잡지 않는다. 서울에는 이미 그런 아파트가 아주 많다"고 적었다. "도착지가 그런 단지로 찍히면 배달료가 아무리 높아도 취소한다", "엘리베이터 키를 로비에서 받아야 하는 곳은 보지도 않고 거절한다"는 반응이 잇따랐다. 배달을 거절하면 그만 아니냐는 시각도 있지만, 수락률 관리 탓에 거절이 늘 자유롭지만은 않다는 것이 기사들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상당수는 "수락률을 신경 쓰느니 그런 단지는 무조건 거절하는 편이 낫다"는 반응을 보였다.

과거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경험담도 쏟아졌다. 한 기사는 "고객이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다길래 중간 층에서 만나자고 했더니 그냥 고층까지 올라오라고 해서 음식을 가게에 돌려주고 그날로 일을 그만뒀다"며 "조선시대 노비가 양반집 심부름을 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다른 기사는 "헬멧을 벗으라는 요구에 매번 실랑이하다 지쳐 그냥 벗고 올라갔는데 앞으로는 1층에 두고 오겠다"고 했다. 탈모 때문에 헬멧을 벗는 것이 트라우마라 요구를 거부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고객을 향한 비판이 특히 많았다. "무료 배달을 시켜 놓고 배달료를 받지 말라는 게 말이 되느냐", "그런 규칙이 있는 아파트에 살면 직접 1층으로 내려와 받으면 된다"는 반응이 다수 공감을 얻었다. 매매가가 100억원에 이르는 초고가 단지에서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는다는 지적, 순순히 헬멧을 벗고 들어가는 기사들이 이런 관행을 굳혔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과거 강남의 한 초고가 단지가 비슷한 논란으로 언론에 오르내린 뒤 방침을 바꿨다는 경험담을 들며 "한 번 크게 알려져야 달라진다"는 반응도 나왔다.

보안을 이유로 든다면 그에 맞는 대안을 갖추라는 의견도 이어졌다. "보안이 그렇게 중요하면 큰 회사 건물처럼 데스크에서 음식을 받아 입주민에게 전달하는 게 맞다", "해외처럼 1층 출입문에서 받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제안이 대표적이다. "까다로운 절차를 두려면 택배 도서·산간 추가 요금처럼 배달료를 더 얹어 주거나 주문 단계에서 요구 사항을 미리 고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거리로 배달료를 매기는 구조에서 이런 추가 부담까지 기사에게 떠넘기는 것은 제도의 문제라는 비판이었다. 실제로 한 이용자는 "다른 지역에서도 헬멧을 벗고 인적 사항을 적으라던 단지가 기사들이 데스크에 음식을 두거나 콜을 잡지 않자 결국 전화번호만 적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전했다.

반면 헬멧을 벗는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한 이용자는 "범죄가 발생했을 때 신원을 특정하기 어렵다. 또한 외국 일부 건물도 로비에 직원이 있으면 헬멧을 벗도록 한다"며 "개인정보는 동의를 받아 수집하고 목적을 이룬 뒤 폐기하면 되는 문제"라고 했다. 다만 아무 이름이나 적고 올라갈 수 있어 실효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는 단서를 달았다. 개인정보를 요구하려면 수집·이용·폐기 절차를 이용자에게 알릴 의무가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동의 없는 개인정보 수집이 개인정보보호법에 저촉될 소지가 있다며 신고를 권하는 이용자도 적지 않았다. 실제 위법 여부는 사안마다 다르지만, 관련 신고 창구로 문제를 제기하면 관행이 바로잡히는 경우가 있다는 조언이 오갔다. 현장 대응 요령을 공유하는 기사들도 있었다. "고객과 통화가 어려우면 곧바로 고객센터에 연락하라.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거나 출입이 막힌 상황이면 1층에 두고 가도 되도록 안내해 준다. 음식을 둔 위치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면 배달료도 문제없이 처리된다"는 것이다.

'배달기사의 인권이나 개인정보가 배달료 2,200원보다 못한건가...헬멧까지 벗기는 천룡인 아파트를 다녀왔습니다'란 제목으로 '해운대주민'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