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인 할아버지에게 자결 권한 '레전드급 친일파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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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후손인데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된 인물
배우 하영(본명 안하영·33)이가 방송에서 4대째 의사 가문인 집안 내력을 소개한 뒤 증조부의 친일 의혹이 불거지면서 친일 인사의 후손이 조상의 행적을 어떻게 마주해 왔는지에 다시 눈길이 쏠리고 있다. 특히 친일파 집안에서 태어나 조상과 정반대 길을 걸은 인물로 을사오적 박제순의 손자 박승유(1924~1990)가 재조명되고 있다.

하영은 지난 7일 방송된 KBS 2TV '옥탑방의 문제아들'에서 "증조할아버지가 일본에서 양의학을 배워 와 한양에 처음으로 병원을 열었고 고종 황제도 진료했다"며 증조부부터 언니까지 4대째 이어진 의사 가문임을 밝혔다. 방송 뒤 온라인에선 하영의 증조부가 의사 안상호라는 추정이 나왔다. 이어 안상호가 1916년 친일단체 대정친목회 평의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대정친목회는 조선인 상류층으로 꾸려진 단체로 이완용이 고문을 맡았다. 안상호는 1902년 일본 도쿄자혜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해 한국인 최초로 일본 의사 자격을 얻었고, 1904년 귀국해 서울 종로3가에 진료소를 열었다.
하영 소속사 비스터스엔터테인먼트는 처음에는 "사실무근"이라고 했다가 입장을 바꿔 "증조부 안상호 선생이 1916년 대정친목회 평의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는 기록이 실제로 존재함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소속사는 "심려를 끼친 점을 깊이 새기고 겸허한 자세로 임하겠다"고 했다.
역사학계에선 안상호의 구체적 친일 행위가 명확히 규명된 것은 아니라며 신중한 접근을 주문하는 의견도 나온다. 증조부 행적을 두고 4대 후손을 몰아세우는 것은 지나치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가운데 독립운동가 박승유의 삶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
박승유는 을사늑약에 외부대신으로 서명한 을사오적 박제순의 친손자이자 조선귀족 자작이던 박부양의 아들이다. 친일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조부의 매국 행적을 평생의 굴욕으로 여겼다. 형 박승경이 일제의 학병에 지원한 것과 달리 그는 항일의 길을 택하면서 한 집안이 친일과 항일로 갈라선 상징적 사례로 꼽힌다.
1924년 인천 제물포에서 태어난 박승유(1924~1990)는 경기공립중학교(현 경기고) 재학 중이던 1940년 동급생들과 비밀결사 'MH회'에 가입해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동지를 포섭했다. 이 조직은 이듬해 주도자 이철주가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 반대 운동 혐의로 일제 경찰에 붙잡히면서 와해됐다. 박승유는 1942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진학해 1944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합격하면 일제에 부역하게 되는 고등문관시험 응시는 거부했다. 대신 아버지의 권유로 일본군에 자원입대해 중국 저장성 이우현의 요코이 부대에 배속됐다.
배치 몇 달 만인 1944년 10월 박승유는 부대를 탈영해 한국광복군에 합류했다. 광복군 제2지대 강남분대에 배속된 그는 장쑤성 난징·우시, 안후이성 우후 일대에서 병력을 모으는 초모공작을 벌였다. 음악에 소질이 있던 그는 야전 방송대에 파견돼 조선인 출신으로 징집된 일본군 병사들에게 광복군 입대를 권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노래를 방송하며 심리전에 앞장섰다. 이 시절 박승유는 "할아버지는 대체 왜 자결하지 않으셨는가. 왜 후손들을 이다지도 욕되게 하는가"라고 자책하며 본명 대신 가명으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광복 뒤 박승유는 조선오페라협회 간사로 성악가의 길을 걸었고, 6·25 전쟁 때는 자원입대해 국방부 정훈부 합창단원으로 야전 부대를 돌며 위문공연을 했다. 1963년 광복군 활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70년 UCLA 유학을 거쳐 1975년 강원대 음악교육과 교수로 부임한 뒤 1989년 정년퇴임했다. 1990년 11월 춘천 자택에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6세. 사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고,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박승유의 독립운동은 오랫동안 가려져 있었다. 조상의 과오를 부끄러워한 그가 스스로 광복군 활동을 숨기고 은둔하듯 지낸 까닭이다. 이 때문에 그의 집안은 '친일파 가문이 해방 뒤에도 잘 산 사례'로 잘못 알려졌다. 그의 항일 행적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연합뉴스 등 언론의 보도를 통해서였다. 그가 눈을 감은 지 9년이 지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