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살바도르, 비트코인 법정화폐 5년 만에 결제 의무 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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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 비트코인 법정화폐 5년, 강제조항은 결국 폐지됐다
그래도 정부는 비트코인 7,400여 개 보유하며 매입 계속 이어가

나이브 부켈레(Nayib Bukele) 엘살바도르 대통령이 2021년 6월 5일(현지시각) 미국 마이애미 비트코인 콘퍼런스에서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하겠다고 발표한 지 5년이 지났다. 같은 해 9월 7일(현지시각) 비트코인법이 시행되며 엘살바도르는 전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인정한 국가가 됐다. 하지만 5년 뒤 국제통화기금(IMF) 압박에 밀려 상점의 비트코인 결제 의무는 사라졌고, 세금도 달러로만 내야 한다. 빈대학교(University of Vienna) 토비아스 부스(Tobias Boos) 박사는 “부켈레가 채택 이유로 내세운 근거를 그대로 따진다면 이 프로젝트가 실패였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국가 단위 비트코인 도입을 이론에서 현실로 끌어낸 상징성만은 부인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강제조항은 사라졌다…IMF 14억 달러 지원의 대가
2024년 12월(현지시각) 엘살바도르 정부는 IMF와 14억 달러(약 1조 9,800억원, 1달러 1,413원 기준) 규모의 금융지원 협정에 합의했다. 이 협정에는 비트코인 관련 개입을 축소한다는 조건이 포함됐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25년 1월 비트코인법을 개정해 상점의 비트코인 수용을 의무가 아닌 선택 사항으로 바꿨다. 세금은 미국 달러로만 납부하도록 했고 공공 부문의 비트코인 관련 활동도 제한했다. 이 협정은 2025년 2월(현지시각) 최종 승인됐다.
IMF는 이후 비트코인이 무은행 인구를 위한 유익한 활용 사례라는 “증거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금융포용에 미친 영향도 미미했다는 평가다. 부스 박사는 이를 “소프트 어답션(soft adoption)”으로 규정하며 “결제 부문 대규모 도입으로 이어진 적이 없다. 비트코인으로 세금을 납부한 사례를 알지 못하고, 관련 인프라는 대부분 그대로 방치돼 있다”고 설명했다.

통계로 본 “동네에서는 안 쓰는 비트코인”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엘살바도르에서 15세 이상 인구 중 은행 계좌를 보유한 비율은 35.9%에 그쳤다. 중남미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정부가 내놓은 치보(Chivo) 지갑은 은행 계좌로 돈을 옮기는 기능은 갖췄지만, 계좌가 없는 사람들이 금융권에 진입하지 못하게 막는 근본적인 장벽은 건드리지 못했다.
부스, 그리게라(Grigera), 슈미드(Schmid)가 2025년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비트코인을 실제로 사용한 시민은 젊고 남성이며 도시에 살고 교육 수준이 높은, 이미 은행 계좌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부스 박사는 “시민 대상 대규모 도입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송금 부문 성적도 비슷하다. 2024년 기준 송금은 엘살바도르 국내총생산(GDP)의 약 24%를 차지했고, 이 가운데 98%가 미국에서 들어왔다. 엘살바도르는 20여 년 전부터 미국 달러를 공식 화폐로 써왔기 때문에 환전 비용 절감이라는 비트코인의 이론적 장점이 애초에 발휘될 여지가 적었다. 코인텔레그래프(Cointelegraph)에 따르면 암호화폐 지갑을 통한 송금 비중은 2020~2021년 한때 1.7%까지 올랐다가 2024년 1% 안팎으로 내려왔다. 크립토브리핑(CryptoBriefing)은 올해 상반기 기준 암호화폐로 정산된 송금 비중이 0.7%까지 더 낮아졌다고 전했다.
가입 시 30달러 상당의 비트코인을 지급했던 치보 지갑도 초기 반짝 흥행에 그쳤다. 전미경제연구소(NBER)의 전국 표본 조사에 따르면 초기 치보 가입자의 60% 이상이 무료로 받은 비트코인을 쓴 뒤 다시는 거래하지 않았다. 엘살바도르를 여러 차례 취재한 비트코인 전문 저널리스트 조 나카모토(Joe Nakamoto)는 산살바도르의 한 쇼핑몰 매장 21곳에서 비트코인 결제를 직접 시도했는데, 이 중 4곳만 받아줬고 매끄럽게 처리된 곳은 1곳뿐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엘살바도르에서 진짜로 비트코인만으로 생활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들다. 엘존테(El Zonte) 해변에서 푸푸사만 먹고 산다면 모를까, 그 밖의 비트코인 순환경제를 오가며 우회로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책은 물러섰지만 정부는 계속 사들인다
법정화폐 지위는 약해졌지만 정부의 매입은 멈추지 않았다. 크립토브리핑에 따르면 엘살바도르 중앙정부는 올해 중반 기준 약 7,400~7,700비트코인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가치는 약 4억 8,000만~5억 달러(약 6,782억~7,065억원)로 추산된다. 부켈레 정부는 정책 틀을 완화한 뒤에도 비트코인 매입을 이어가고 있다. 이 매체는 비트코인 가격이 1만 달러 움직일 때마다 정부 보유분의 가치는 약 7,500만 달러씩 흔들린다며, 이는 국가 예산 규모를 고려하면 세계에서 가장 집중된 국가 단위 단일 자산 베팅 중 하나라고 짚었다. 암호화폐 리서치 매체 플루앙(Pluang)도 정부가 여전히 약 5억 달러 규모의 비트코인 보유량을 유지하며 추가 매입을 계속하고 있다고 전했다.
세계에 남긴 것, 그리고 다른 나라에 주는 교훈
엘살바도르가 실패한 건 국내 정책 목표였지만, 국제 무대에서 얻은 건 확실히 있었다. 크립토브리핑에 따르면 엘존테의 “비트코인 비치”는 관광 명소가 됐고, 갱단 범죄와 이주 문제로 주로 국제 뉴스에 오르던 나라의 이미지도 달라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비트코인 인프라 기업 JAN3의 샘슨 모우(Samson Mow) 최고경영자는 이번 실험 이후 각국 대통령과 재무 당국이 마주하는 질문의 성격 자체가 달라졌다고 평가했다. 국가가 비트코인을 보유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 더 이상 가정형이 아니게 됐다는 의미다.
동시에 IMF가 비트코인 정책 후퇴를 지원 조건으로 못박은 전례는 다른 나라에도 신호를 남겼다. 크립토브리핑은 유사한 실험을 검토하는 개발도상국이라면 국제 대출기관이 지렛대를 동원해 정책을 제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데이터로 확인한 셈이라고 짚었다. 부스 박사는 “엘살바도르가 어떤 목표를 이루려 했다고 보느냐에 따라 이 실험의 성패 평가는 달라진다”고 말했다. 부켈레가 내세웠던 무은행 인구 포용과 송금비용 절감이라는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지만, 국가가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삼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증명한 것은 이 실험이 남긴 가장 뚜렷한 성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