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의 전설' 백인천 타계... 이승엽의 은사로도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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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경색 투병 중 병세 악화해 14일 자택서 별세

백인천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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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가 배출한 단 한 명의 4할 타자가 눈을 감았다. 프로야구 원년 타율 4할 1푼 2리로 '4할의 전설'로 불린 백인천 전 LG 트윈스 감독이 향년 84세로 14일 오전 6시 30분께 충남 천안시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OSEN이 이날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고인은 뇌경색으로 오랜 기간 투병해왔다. 최근 병세가 급격히 악화했고 끝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고인이 한국 야구사에 남긴 가장 선명한 족적은 1982년 프로야구 첫 시즌에 세운 타율 4할 1푼 2리다. MBC 청룡(LG 트윈스 전신) 감독 겸 선수로 그라운드에 선 고인은 40대를 앞둔 나이에 한 시즌 4할 타율을 찍었다. 이 기록은 44년이 흐른 지금까지 KBO 리그에서 단 한 차례도 재현되지 않았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4할 타율을 기록한 타자는 한국과 미국, 일본 프로야구를 통틀어 고인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그 무게는 더 묵직하다. 선수와 감독을 동시에 맡은 사례 역시 한국 프로야구에서 고인이 유일하다.

백인천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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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할은 곧 백인천을 상징하는 숫자로 굳어졌다.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협회가 매년 최고의 아마추어 타자에게 주는 상의 이름은 고인의 타율에서 따온 'BIC 0.412상'이다. 2013년에는 정재승 카이스트(KAIST) 교수 등이 참여해 한국 프로야구에서 왜 더 이상 4할 타자가 나오지 않는지 분석한 과학 논문 '백인천 프로젝트'가 출간됐고, 고인은 직접 추천사를 쓰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프로젝트가 학문의 영역에서 논의될 만큼 고인의 4할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하나의 상징으로 남았다.

고인은 1942년 중국 장쑤성 우시에서 태어났다. 8·15 광복 뒤 부친의 고향인 평안북도 철산에서 지내다 6·25 전쟁 전에 월남해 서울에 정착했다. 유년기를 성북구 돈암동에서 보낸 고인은 서울 효제초등학교를 나와 중학 시절 야구를 시작했고, 경동고 시절 초고교급 선수로 이름을 알렸다. 고인은 1961년 농협에 입단해 그해 국가대표 포수로 처음 발탁돼 아시안게임 무대를 밟았다.

고인은 이듬해인 1962년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해 토에이 플라이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소속 팀은 매각을 거치며 닛타쿠홈 플라이어스를 지나 닛폰햄 파이터스로 간판을 바꿨다. 투고타저 성향이 뚜렷하던 당시 일본 무대에서 고인은 꾸준한 타격으로 살아남았다. 고인은 1975년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로 이적한 그해 3할 1푼 9리로 퍼시픽리그 타격왕에 올랐고, 이어 롯데 오리온스(1977~1980년)와 긴테쓰 버팔로스(1981년)에서 뛰었다. 일본 무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고인은 통산 200홈런과 200도루를 넘기며 장타력과 주력을 두루 갖춘 호타준족으로 자리매김했다.

토에이 시절인 1965년에는 야구 인생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장면도 있었다. 긴테쓰와의 경기에서 3-5로 뒤지던 9회 말, 무사 주자 1·2루에서 고인이 역전 끝내기 3점 홈런을 터뜨렸다. 그러나 전력으로 1루를 돌던 고인이 타구를 지켜보던 1루 주자를 추월하는 바람에 아웃이 선언되면서 홈런이 취소됐다. 앞선 두 주자의 득점만 인정돼 5-5로 동점을 이루는 데 그쳤고, 팀은 연장 끝에 패했다.

백인천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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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에 맞춰 귀국해 초대 MBC 청룡 감독 겸 선수로 뛰며 원년 4할 신화를 완성했다. 일본 프로야구 19년, 한국 프로야구 3년(MBC 청룡 1년, 삼미 슈퍼스타즈 2년)에 이르는 만 22년의 선수 인생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유일한 한국 프로야구 선수였고, 일본 프로야구에서 뛴 한국 국적 선수 가운데 광복 이후 독립한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첫 선수이기도 했다.

지도자로서도 고인은 굵직한 성취를 남겼다. 고인은 1990년 LG 트윈스 창단 감독을 맡아 그해 팀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려놨다. 창단 첫해 우승이라는 값진 성과였다. 이후 1996년 삼성 라이온즈 지휘봉을 잡아 이승엽을 비롯한 젊은 타자들을 키워냈다. 이승엽은 훗날 고인을 자신의 은사로 꼽았다. 최익성 역시 고인을 야구 인생의 은인으로 여겼다. 2002년에는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역임했다. 삼성 감독이던 1997년 처음 뇌경색 증상이 나타나 한때 지휘봉을 내려놓기도 했다.

명확한 타격 이론을 지녔던 고인은 장비에도 유별난 관심을 쏟았다. 감독 시절부터 프로 선수라면 최고의 장비를 써야 한다며 구단에 직접 브랜드 장비를 요구할 정도였다. 지도자 생활을 마친 뒤에는 야구용품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후배들의 타격 폼을 봐주고 몸에 맞는 배트를 추천해주는 일에도 아낌이 없었다.

지도자 생활을 마친 뒤 고인은 SBS 스포츠 등에서 일본 프로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2016년 올스타전에서는 자신이 초대 감독을 맡았던 원년 MBC 청룡 모자를 쓴 채 시구에 나섰다. 2019년 열린 WBSC 프리미어12 한국-호주 개막전에서도 마운드에 올라 팬들과 마주했다. 두 차례 모두 병의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한 가운데 이뤄진 이벤트였다.

지도자와 방송 무대에서 물러난 뒤 고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사기 피해로 생활고를 겪었다. OSEN에 따르면 네 차례의 뇌경색과 한 차례의 뇌출혈로 오랜 세월 병마와 싸웠으나 초인적인 의지로 버텨왔다. 곁에서 돌봐줄 가족이 국내에 없어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아 천안에서 홀로 지냈다. 근래에는 인지 기능과 거동이 크게 나빠져 스스로 일상을 이어가기 어려운 상태였다. 화장실에서 넘어져 발가락이 골절되고 욕창까지 겹치면서 입원이 시급했으나 인근 병원에 입원실이 없어 곧바로 병상을 구하지 못했다고 매체는 전했다. 입원비 마련조차 여의치 않았지만 야구계와 주변의 도움으로 어렵게 치료를 받았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명언으로 유명한 요기 베라를 좋아했던 고인은 현역 시절 '투혼의 야구'를 강조하며 한국 프로야구에 정신력과 투쟁심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21년 프로야구 40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레전드 올스타 40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선수와 감독을 넘나들며 한국 야구 반세기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원로였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고인의 장례를 KBO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한다. 빈소는 천안 단국대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미국에 거주 중인 동생이 귀국한 뒤 정해질 예정이다.

백 전 감독이 별세하면서 1982년 프로야구 6개 구단 초대 감독 가운데 생존한 인물은 박영길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85) 한 명만 남게 됐다고 OSEN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