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치료' 판을 흔들다... 알츠하이머병 치료 신기원 열어젖힌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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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밀로이드 도그마'에 균열 낸 한국의 스위치... 알츠하이머 30년 연구 지형이 흔들린다
30여 년간 알츠하이머병(전체 치매 원인의 60~70%를 차지하는 가장 흔한 치매의 형태)연구는 사실상 하나의 문장에 붙들려 있었다. '뇌에 쌓인 독성 단백질 아밀로이드 베타를 걷어내면 병을 멈출 수 있다.' 이 아밀로이드 가설에 막대한 연구비와 수많은 신약 후보가 쏟아졌다. 그리고 2023년과 2024년 잇따라 미국 식품의약국(FDA) 문턱을 넘은 레카네맙(lecanemab)과 도나네맙(donanemab)이 마침내 답을 내놨다. 그러나 성적표는 냉정했다. 두 항체 신약은 뇌 속 플라크를 극적으로 씻어냈지만 환자의 인지 저하 속도를 각각 27%, 35%가량 늦추는 데 그쳤다. 플라크는 지워졌는데 환자의 시간은 좀처럼 되돌아오지 않았다. ‘나무를 보느라 숲을 놓친 것 아니냐’는 회의가 학계 안에서 짙어진 배경이다.

아밀로이드를 제거하는 치료제가 개발됐는데도 효과가 제한적이었던 이유는 병의 얼개 자체에 있다. 알츠하이머병은 기억력과 인지기능이 떨어지는 대표적 퇴행성 뇌질환으로, 뇌에 아밀로이드 베타가 비정상적으로 쌓이는 것이 주요 특징으로 꼽혀 왔다. 그러나 병이 진행되면 신경회로의 과도한 흥분과 시냅스 소실, 교세포의 염증 반응 등 다른 비정상적 변화가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이미 시작된 여러 병리 증상이 서로 영향을 주며 병을 악화시킨다는 '악순환'의 가능성은 계속 제기됐다. 다만 그 악순환을 유발하는 근본 요인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기초과학연구원(IBS) 혈관 연구단이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8월 27일 0시(한국시간) 실은 이번 연구는 바로 이 교착에 다른 각도의 질문을 던진다. 아밀로이드라는 결과물이 아니라, 여러 병리를 한꺼번에 켜는 '스위치'가 따로 있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다. 정원석 IBS 혈관 연구단 부연구단장(KAIST 생명과학과 부교수) 연구팀은 그 스위치로 'ERBB4'라는 수용체 단백질을 지목했다. 연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IBS 기초과학연구단 지원 사업으로 이뤄졌다.
왜 이 발견이 '판'을 흔드나
ERBB4 자체는 신경과학계에 낯선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오래 연구된 단백질이다. ERBB4는 세포막에서 외부 신호를 감지해 세포의 성장과 분화, 신경세포 기능 등을 조절하는 수용체다. 다만 지금까지 학계의 상식은 ERBB4가 회로의 과흥분을 억누르는 억제성 신경세포에서 주로 작동한다는 것이었다. 2017년 중국 연구진은 억제성 신경세포에서 ERBB4를 제거하면 알츠하이머 모델 생쥐의 시냅스·인지 손상이 완화된다는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ERBB4는 늘 '억제 담당' 세포의 문제로 다뤄져 왔다.

이번 연구의 반전은 그 스위치가 엉뚱한 세포에서 켜진다는 점이다. 정 부연구단장 팀은 알츠하이머병 모델 생쥐의 해마를 분석했다. 그 결과 뇌 회로를 자극하는 흥분성 신경세포는 과도하게 활성화됐고, 이를 억누르는 억제성 신경세포의 활성은 크게 떨어져 있었다. 신경세포가 아닌 별아교세포와 미세아교세포의 움직임도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이들 교세포가 흥분성 시냅스는 과도하게 제거하는 반면 억제성 시냅스는 적게 제거하면서, 회로의 불균형을 더 부추긴 것이다. 별아교세포는 신경세포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시냅스 형성과 제거로 뇌 항상성을 유지하는 세포다. 미세아교세포는 뇌의 면역을 맡아 손상된 세포나 불필요한 시냅스를 정리한다.
연구팀은 이 불균형의 뿌리가 결국 신경세포의 비정상적 활성 상태에 있음을 확인했다. 인위적으로 신경세포의 활성을 높이면 교세포가 시냅스를 더 많이 제거했고, 활성을 낮추면 덜 제거했다. '누가 시냅스를 자르는가'라는 질문의 답이 교세포가 아니라 그 위에서 신호를 보내는 신경세포에 있다는 단서였다.
여기서 분자 수준으로 파고든 연구팀은 정상 뇌의 억제성 신경세포에 있어야 할 ERBB4가 특정 흥분성 신경세포 집단에서 현저히 늘어 있는 것을 찾아냈다. 세포 하나하나의 유전자 활동을 읽는 단일핵 RNA 시퀀싱으로, 질병 초기부터 유전자 발현이 크게 바뀌는 흥분성 신경세포 무리를 포착한 것이다. 연구팀은 이 세포를 '초기 반응성 흥분성 신경세포(EREN)'로 명명하고, ERBB4를 회로 이상을 일으키는 핵심 인자로 특정했다. 잘못된 스위치가, 잘못된 세포에서 켜진 셈이다.
흩어진 퍼즐 조각을 하나로 꿰다
이 발견이 주목받는 진짜 이유는 그동안 따로 놀던 알츠하이머 연구의 조각들을 하나의 축으로 엮어냈다는 데 있다.
첫 번째 조각은 '흥분·억제 불균형'이다. 미국 글래드스톤연구소의 렌나트 무케(Lennart Mucke)·호르헤 팔롭(Jorge Palop) 연구팀은 2007년부터 알츠하이머 모델 생쥐에서 흥분성 신경세포가 과도하게 날뛰고 억제성 회로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규명해 왔다. 실제로 항전간제 레베티라세탐(levetiracetam)으로 이 과흥분을 가라앉히면 인지기능이 일부 개선된다는 임상·동물 연구가 이어졌다. 이번 IBS 연구는 그 불균형이 왜 생기는지를 분자 수준에서 채워 넣는다. ERBB4가 켜진 흥분성 세포가 과흥분의 발원지라는 것이다.

두 번째 조각은 '누가 시냅스를 잡아먹는가'다. 제넨텍과 브로드연구소 공동 연구팀은 2022년 네이처 에이징(Nature Aging)에 별아교세포와 미세아교세포가 보체 단백질 C1q에 기대어 시냅스를 제거하며, 별아교세포는 흥분성 시냅스를, 미세아교세포는 억제성 시냅스를 주로 삼킨다고 보고했다. 교세포의 시냅스 가지치기가 알츠하이머 병리의 한 축이라는 흐름이다. IBS 연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교세포가 왜 특정 시냅스를 비정상적으로 제거하는지를 물었고, 그 방아쇠가 흥분성 신경세포의 비정상적 활동과 ERBB4 발현이라는 답을 내놨다. 교세포 중심으로만 설명돼 온 시냅스 손실 이야기에 '신경세포가 먼저 신호를 보낸다'는 새 층위를 더한 것이다.
세 번째 조각이 아밀로이드다. 연구팀은 유전자 가위 기술로 알츠하이머 모델 생쥐의 흥분성 신경세포에서만 ERBB4를 선택적으로 제거했다. 그러자 과도했던 흥분성 신경세포의 활성은 낮아졌고, 저하됐던 일부 억제성 신경세포의 활성이 회복됐다. 교세포의 비정상적인 시냅스 제거와 염증 반응도 완화됐다. 아밀로이드 플라크 형성 면적과 수량은 50% 이상 줄었다. 이에 따라 기억력과 공간인지 능력도 크게 개선됐다. 반대로 정상 생쥐의 흥분성 신경세포에 ERBB4를 발현시키자, 아밀로이드 플라크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도 신경회로의 과흥분과 시냅스 불균형, 교세포의 염증 반응 등 알츠하이머병과 똑같은 병리 변화가 나타났다. 아밀로이드가 원인이 아니라 이 스위치가 만드는 여러 결과 중 하나일 수 있다는, 아밀로이드 가설의 무게중심을 흔드는 대목이다.
'인과'를 증명한 것이 핵심
수많은 알츠하이머 논문이 '연관성'에서 멈춘다. A가 늘 때 B도 늘더라는 상관관계다. 이번 연구가 무게를 갖는 이유는 필요성과 충분성을 모두 검증했기 때문이다. ERBB4를 없애면 병리가 완화되고(필요성), ERBB4를 켜면 병리가 생긴다(충분성). 인과를 양방향으로 보인 실험 설계다.
여기에 연구팀은 작동 경로까지 짚었다. ERBB4가 늘면 세포의 성장과 대사를 조절하는 '엠토르(mTOR)' 신호전달 체계가 과도하게 활성화되면서 병리가 주변으로 번진다는 기전을 입증한 것이다. mTOR는 세포의 성장과 대사, 단백질 합성 등 다양한 생명현상을 조절하는 세포 안 신호전달 단백질이다. ERBB4 아래에서 작동하는 이 mTOR 신호를 낮추자 ERBB4 증가로 나타났던 변화가 차단됐다. ERBB4-mTOR 축이 여러 병리를 잇는 공통 배선이라는 얘기다.

사람 데이터도 방향을 뒷받침했다. 연구팀은 446명 규모의 공개 뇌 전사체 자료와 사람 뇌 조직을 분석했다. 그 결과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흥분성 신경세포 안 ERBB4 발현이 유의미하게 늘어 있었다. 발현량이 클수록 아밀로이드 플라크의 축적 정도가 커졌고 인지기능 저하도 심각했다. 동물실험에서 찾아낸 조절축이 사람의 병에서도 의미를 가질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결과다.
하나의 후보로 좁히기까지
이 스위치를 찾아내는 과정은 방대한 계산과의 싸움이었다. 단일세포 시퀀싱 분석은 수만 개의 세포에서 세포마다 2만 개가 넘는 유전자의 발현을 조사하는 작업이다. 그룹 사이 비교로 발현 차이가 나는 유전자를 골라낼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도 수백 개의 후보 유전자가 남는다. 연구팀은 유사한 발현 패턴을 보이는 유전자들을 묶어 분석하는 가중 유전자 공동발현 네트워크 분석(WGCNA)을 동원했다. 여러 유전자군 가운데 '터쿼이즈(turquoise) 모듈'에서 ERBB4를 주요 후보로 발굴했다. 외부에 공개된 다른 단일세포 시퀀싱 자료까지 함께 분석해, 서로 다른 데이터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는 결과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수많은 후보를 ERBB4 하나로 좁히는 데 오랜 시간이 든 이유다.
남은 문제 그리고 냉정한 조건들
물론 넘어야 할 벽은 분명하다. 핵심 실험은 생쥐 모델에서 이뤄졌다. 사람에게서 확인된 부분은 사후 뇌 조직과 전사체 자료 분석에 근거한 상관관계 수준으로, 생쥐에서 보인 인과가 사람 환자에게 그대로 옮겨간다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mTOR와 ERBB4는 암을 비롯한 여러 질환과 정상 생리에 깊이 관여하는 신호인 만큼, 뇌의 특정 세포에서만 이를 조절하는 치료제를 만드는 일은 또 다른 난제다. 교세포가 흥분성·억제성 시냅스를 각각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대해서도 제넨텍·브로드 팀과 IBS 팀의 관찰이 세부에서 엇갈리는 지점이 있어, 종을 넘나드는 검증이 더 필요하다.
그럼에도 이번 성과가 던지는 방향은 뚜렷하다. 정 부연구단장은 "이번 연구 결과는 알츠하이머병의 증폭 과정을 다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단서"라며 "질병 악순환의 핵심 고리를 표적해 복잡·다양한 병리를 동시에 완화하는 새로운 치료 전략 개척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하나의 병변만 겨냥하던 '단일 표적' 시대에서, 여러 병리가 함께 악화하는 상위 조절점을 노리는 '스위치 표적'으로 무게추가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의 제1저자는 이세영 IBS 혈관 연구단 선임연구원이 맡았다.
연구팀은 이미 다음 목표를 보고 있다. 노화 과정에서 ERBB4 유전자와 단백질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리고 ERBB4를 발현하는 흥분성 신경세포가 파킨슨병, 헌팅턴병, 타우 관련 질환 등 다른 퇴행성 뇌질환 환자 데이터에서도 발견된 만큼 이 단백질이 여러 질환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다음 실험대에 오른다. 알츠하이머의 스위치로 지목된 ERBB4가, 여러 퇴행성 뇌질환에 공통으로 적용할 치료 표적이 될 수 있을지가 연구팀이 좇는 다음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