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란씨 자살한 것 같다"더니... 갑자기 말 바꾼 경찰 (이유)
작성일
"부패해 사인 알 수 없다"며 입장 번복
성급한 사인추정 발표 두고 비판 제기
제주에서 실종 104일 만에 숨진 채 발견된 30대 여성의 사망 원인을 두고 경찰이 결국 말을 바꿨다. 시신 발견 초기부터 극단 선택에 무게를 싣던 경찰이 이제 와 "사인을 알 수 없다"고 밝힘에 따라 성급한 발표가 수사를 스스로 흔들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홍석기 국가수사본부장은 31일 경찰청에서 열린 정례 기자간담회에서 장미란씨의 사망 원인에 대해 "시신 부패로 사인 불명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하고 있다"고 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에서도 부패가 심해 사인을 특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설명은 불과 일주일 전 경찰이 내놓은 입장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경찰은 지난 24일 제주시 한림읍 야자수 농장에서 장씨 시신을 발견한 직후 "시신의 자세와 위치 등으로 볼 때 타살 가능성은 낮다"고 밝혔다. 같은 날 한 경찰 관계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현재로선 자살로 추정한다"고 못 박기도 했다.
경찰 지휘부의 발언은 더 앞서 나갔다.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은 같은 날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 나와 범죄 피해 가능성이 낮다고 본 근거를 추궁받았다. 유 직무대행은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다"면서도 "제주경찰청장에게 보고받기로는 목을 매 숨진 것으로 추정한다"고 답했다. 부검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사망 방식까지 국회에서 공개한 셈이다.
경찰은 부검 뒤에도 장씨가 야자수에 목을 매 숨진 것으로 추정한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근거로는 장씨가 주거지에서 갖고 나간 것으로 보이는 끈이 야자수 줄기에서 발견된 점을 들었다. 현장 감식에서 줄기를 직접 당겨 강도를 확인한 결과 나무 윗부분이 사람 무게를 지탱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설명도 내놨다.

그러나 현장을 둘러싼 의문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시신이 발견된 야자수 농장은 야간에 여성이 혼자 찾아가기 어려울 만큼 인적이 드물고 어두운 곳이다. 야자수 줄기가 약한 데다 뾰족한 부분이 많아 목을 매 숨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이어진다.
말 바꾸기는 사인 판단에만 그치지 않았다. 경찰은 목맴사가 가능한지 확인하겠다며 지난 27일 야자수 농장에서 재연 실험을 했다. 이때도 경찰은 처음엔 '자살이 가능하다'는 취지로 설명하다가 관련 보도가 나와 논란이 일자 "아직 재연 실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며 말을 거뒀다. 전문적인 검토에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였다.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서도 '가능하다'는 취지를 먼저 흘린 셈이어서, 경찰이 결론을 정해 놓고 끼워 맞춘다는 의심만 키웠다.
홍 본부장은 장윤기 사건에 이어 제주 실종사건까지 부실 수사가 잇따른 데 대해 "일부 담당자의 일탈뿐 아니라 저를 포함한 관리자의 지휘·감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며 "반성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수사권을 방기하거나 남용한 수사관, 지휘를 제대로 하지 못한 지휘관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이번 죽음의 출발점에는 한 경찰관의 허위 종결이 있다. 제주서부경찰서 실종팀에서 근무한 A 경장은 실종 신고를 허위로 종결한 혐의로 구속돼 수사받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A 경장은 2025년 3월 10일부터 지난달 23일까지 약 16개월간 자체 종결한 298건 가운데 63건을 실종 프로파일링 시스템에 입력하지 않거나 삭제했다. 시스템 처리를 뺀 자체 종결만 235건이다. 비슷한 기간 근무한 동료 경찰관들의 137건, 37건보다 훨씬 많았다.

장씨의 사건도 이렇게 사라졌다. A 경장은 장씨의 실종 신고를 허위로 종결한 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시스템에 입력하고 관리목록에서 삭제한 것으로 조사됐다. 살아 있을지 모를 실종자를 서류상 사망자로 만들어 지워 버린 것이다. 그렇게 방치된 장씨는 허위 종결 뒤 100여일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A 경장은 실종 신고 접수 당시 실종자와 통화했다는 자신의 주장이 거짓이었다며 일부 혐의를 시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뒤늦게 진화에 나섰다. 제주경찰청은 약 20명으로 조사팀을 꾸려 A 경장이 처리한 298건을 전수조사했다. 결과는 다음달 1일 발표한다. A 경장의 허위 보고를 결재한 관리자와 현장에 함께 출동한 동료 경찰관에 대해서도 감찰이 진행 중이다. 전국 경찰은 최근 3년간 종결한 실종사건 약 31만건을 오는 11월 말까지 전수 점검하기로 했다. 지난 28일 기준 약 1만5100건을 살폈지만 문제 사례는 보고되지 않았다고 경찰은 밝혔다.
하지만 경찰이 스스로를 조사한다는 점에서 신뢰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종 신고를 허위로 종결한 뒤 사망자가 잇따라 확인된 상황에서 '제 식구 감싸기'와 사건을 덮는 '암장'(暗葬) 관행을 떠올리면 외부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배상훈 프로파일러는 "실종 사건에 제3의 기관이 참여하는 시스템 마련이 먼저이며, 그 위에서 이번 전수조사를 제3의 기관이나 위원회가 검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배 프로파일러는 "이번 허위 종결이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며 교제 폭력 등 관계성 폭력 사건까지 전수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사회의 분노도 거리로 나왔다. 공익광고 전문가 이제석씨가 운영하는 이제석 광고연구소는 전날 제주시 한림읍과 제주서부경찰서 일대에서 폐쇄회로(CC)TV를 활용한 게릴라 공익캠페인을 벌였다. 제주서부경찰서 앞에는 경찰을 감시한다는 뜻을 담아 CCTV를 형상화한 공익광고가 설치됐다.
경찰은 장씨 등 2명의 실종 신고를 허위로 종결한 혐의로 구속한 A 경장을 다음달 1일 검찰에 송치한다. 같은 날 제주경찰청은 A 경장이 처리한 298건에 대한 전수조사 결과를 구체적으로 발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