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역사학자 "육영수 저격사건, 의혹 있는 건 사실이고 가장 큰 의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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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잘 만든 정치영화... 윗선이 박정희라는 내용 없다"

역사학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영화 ‘암살자(들)’을 두고 역사 왜곡 논란이 이는 것과 관련해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의 진실을 다시 조사하자면서 재조사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1일 '영화 암살자(들) 팩트체크 10가지 : 육영수 여사는 대체 누가 쏘았나?'라는 제목의 영상을 자신의 유튜브 채널 '이덕일 역사TV'에 올려 이 같이 밝혔다.

1974년 8월 15일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 여사(모자이크 처리한 인물)가 문세광의 총에 맞고 쓰러지고 있다. / 연합뉴스 자료사진
1974년 8월 15일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 여사(모자이크 처리한 인물)가 문세광의 총에 맞고 쓰러지고 있다. / 연합뉴스 자료사진

허진호 감독이 연출한 '암살자(들)'은 지난달 23일 개봉했다. 1974년 8월 15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벌어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다. 배우 유해진이 형사 박철구 역을, 박해일이 신문사 사회부장 김재환 역을, 이민호가 사회부 기자 한영일 역을 맡았다. 영화는 저격 사건이 정권의 국면 전환용이었을 수 있다는 가설 아래 중앙정보부 배후 가능성을 추적하는 내용을 담았다.

개봉 직후 정치권을 중심으로 역사 왜곡 논란이 일었다. 보수 야권을 중심으로 영화가 사건의 배후를 박정희 전 대통령인 것처럼 왜곡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제작진은 입장문을 발표해 "영화 어디에서도 특정 인물을 사건의 배후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이덕일 역사 TV'에 올라온 영상.

이 소장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영화를 봤다고 밝혔다. 이 소장은 "볼 때만 해도 잘 만든 정치영화라고 생각했다"며 "정치적으로 이렇게 논란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문세광에게 저격을 시켰다는 식으로 영화를 비판하는 데 대해 반박했다. 이 소장은 "이 영화에선 그런 얘기가 안 나온다"며 "윗선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정도로 암시할 뿐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얘기는 일언반구도 안 나온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팩트체크의 주요 근거로 김교식 작가의 취재를 들었다. 김 작가 '제3공화국'과 '독도수비대', '광복20년'을 저술한 방송작가 겸 소설가이자 한국 현대사 연구가다. 이 소장은 약 20년 전 김 작가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 몇 달간 고정 출연하며 인연을 맺었다고 설명했다. 이 소장에 따르면 김 작가는 1990년 펴낸 '다큐멘터리 박정희' 3권에서 사라진 탄두, 판결문에 나타난 의문점 등을 소제목으로 이 사건을 심층 취재했다.

이 소장은 영화 속 유해진이 연기한 형사의 실존 모델이 이건우 당시 서울시경 감식계장(경감)이라고 했다. 이 전 경감은 당시 수사본부에 참여해 현장 감식을 맡은 인물이다. 이 전 경감은 1989년 월간 '다리' 인터뷰에서 육 여사가 문세광의 총에 숨진 게 아니라는 취지의 의혹을 제기했다.

‘암살자(들)’ 스틸
‘암살자(들)’ 스틸

이 소장이 첫 번째로 짚은 건 문세광의 행사장 출입 경위다. 이 소장은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에 비표 없이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문세광이 일본대사관에서 왔다고 말하자 그대로 통과됐다는 것이다. 이 소장은 "광복절은 일본이 패망한 날"이라며 "그 자리에 일본대사관 직원이 비표도 없이 나타날 리도 없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입국 후 행적이다. 문세광은 사건 9일 전인 1974년 8월 6일 일본인 요시이 유키오 명의의 가짜 여권으로 김포공항에 입국했다. 이 소장은 문세광이 권총을 분해해 라디오 속에 숨겨 들여왔는데도 세관에서 걸리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문세광이 행사장에 타고 왔다고 발표된 승용차 번호도 조회해 보니 없는 번호였다고 주장했다. 이 소장은 문세광이 경호관의 안내를 받아 입장했으며 다른 참석자보다 23분 늦게 자리에 앉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국립극장 수용 인원 약 1300명 가운데 경호실 직원과 경찰이 548명이었다는 점도 거론했다.

세 번째는 발사된 총탄 수다. 이 전 경감은 문세광이 4발을 쐈다고 주장했다. 판결문에는 5발로 기록됐다. 판결문은 첫 발이 문세광 자신의 대퇴부에, 둘째 발이 연단에 맞았다고 적었다. 셋째 발은 불발이었다. 넷째 발이 육 여사에게, 다섯째 발이 태극기에 맞았다는 게 판결문 내용이다.

네 번째는 결정적 증거인 탄두의 행방이다. 이 소장은 육 여사를 맞힌 탄두만 찾으면 누구의 총에서 발사됐는지 쉽게 밝힐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소장은 "정작 육 여사를 맞힌 탄알이 없다"고 말했다.

다섯 번째는 관통 부위 기록이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수술을 맡은 서울대병원 의료진은 두부 관통 총상이라고만 밝혔다. 박목월 시인은 저서 '육영수 여사'에서 총알이 왼쪽 뇌정맥을 꿰뚫었다고 썼다. 문세광 판결문에는 두부 우측으로 기록됐다.

여섯 번째로 이 소장은 현장이 보존되지 않았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 전 경감은 사건 다음 날 현장에 갔지만 탄두를 한 발도 찾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일곱 번째는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합창단원 장봉화양의 죽음이다. 장양도 이날 총에 맞아 숨졌다. 이 소장은 문세광이 B열과 C열 사이 통로에서 총을 쐈는데 장양은 D열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소장은 당시 청와대 경호실이 경호원이 총을 쐈다고 시인했다고 설명했다. 이 소장은 "그럼 청와대 경호원도 총을 쐈다는 것 아니냐"며 "누구 총에 맞았는지 알아보면 좌파냐"고 물었다.

‘암살자(들)’ 스틸
‘암살자(들)’ 스틸

여덟 번째는 현장검증이다. 이 소장은 문세광 대신 형사가 대역을 맡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현장검증은 8월 16일 하루 만에 끝났다. 발표는 22일에 이뤄졌다. 신문 보도는 23일에야 나왔다는 게 이 소장의 설명이다. 이 소장은 "일반 노숙자 살해 사건도 이렇게 처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왜 철저한 진상 조사를 지시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했다. 다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건을 사주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저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문세광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문세광은 1974년 9월 12일 기소됐다. 약 한 달 만에 사형이 선고됐다. 항소와 상고도 차례로 기각됐다. 대법원 상고 기각 사흘 만인 12월 20일 사형이 집행됐다. 이 소장은 문세광이 사형 집행 직전 "나는 일본에서 그들에게 속았다"는 말을 남겼다며 '그들'이 누구인지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소장은 이 사건으로 가장 큰 정치적 이득을 본 쪽이 유신 정권이라고 분석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유신을 선포해 헌법을 정지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1974년 1월 8일에는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했다.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같은 해 11월 2일 일본을 방문해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에게 사과했다.

1974년 4월 3일에는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됐다.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은 1975년 대법원 확정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이 소장은 "이렇게 박정희 정권이 코너에 몰리다가 육 여사가 세상을 떠나자 추모 분위기로 정국이 반전됐다"고 말했다. 정부는 사건 발생 열흘이 채 안 된 1974년 8월 23일 긴급조치 1호와 4호를 해제했다.

‘암살자(들)’ 스틸
‘암살자(들)’ 스틸

이 소장은 재조사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이 소장은 "복잡할 것 없이 재조사하면 된다"며 "세월은 많이 지났지만 문세광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조총련의 돈을 받았는지, 총탄이 어떻게 됐는지 다 조사해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육 여사 피격을 사과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 소장은 2002년 박근혜 전 대통령(당시 국회의원)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 위원장이 사과한 건 1968년 1·21 사태였다고 주장했다. 1·21 사태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했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입니다.

이 소장은 "북한은 육 여사 사건에 대해 시종일관 자기들과 상관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암살 사건도 예로 들었다. 이 소장은 "케네디 암살 사건에 대해 아직도 영화가 계속 나오지만 그 영화를 만들었다고 누가 좌파네 우파네 하지 않는다"며 "의문이 있으니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