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자(들)' 상영 말라는 국민의힘 요구에... 싱가포르영화제가 단호히 밝힌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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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대로 개막작으로 상영”

싱가포르국제영화제(SGIFF)가 영화 '암살자(들)'을 예정대로 개막작으로 상영한다고 밝혔다. 국민의힘이 서한을 보내 요구한 개막작 선정 철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5일 서울 시내 한 영화관에 '암살자(들)' 포스터가 걸려 있다. / 뉴스1
지난 5일 서울 시내 한 영화관에 '암살자(들)' 포스터가 걸려 있다. / 뉴스1

8일 정치권에 따르면 싱가포르국제영화제 측은 "개막작 '암살자(들)'을 둘러싼 일련의 논의를 인지하고 있다"며 "제작진의 창작적 비전을 존중하며, 본 작품은 변함없이 개막작으로 상영될 예정"이라고 전날 밝혔다.

영화제 측은 "제작진이 본 작품을 역사적 사건에 허구의 인물과 상황을 결합한 영화적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설명해 왔다"며 "역사적 결론을 내리거나, 사실을 왜곡하거나, 어떠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고 했다. 그루면서 "이러한 맥락에서 본 작품을 하나의 창작물로 선보이고자 한다"고 밝혔다.

선정 경위에 대해서는 "본 작품은 예술적 성취와 동시대 아시아 영화에 대한 기여를 바탕으로 SGIFF의 독립적인 프로그래밍 과정을 통해 선정된 것"이라고 했다. 영화제 측은 영화가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점과 국내에서 250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한 점도 상영 유지 이유로 들었다.

국민의힘은 지난 6일 정점식 원내대표 명의로 제레미 추아 싱가포르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에게 서한을 보냈다. 서한은 "싱가포르국제영화제가 영화 '암살자(들)'을 개막작으로 선정한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그 결정을 즉각 재고해 주실 것을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 109명 전원의 뜻을 모아 촉구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국민의힘은 서한에서 "영화제의 문을 여는 개막작 선정에는 더욱 신중한 판단과 책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실제 피해자와 유가족이 존재하는 역사적 비극을 왜곡한 '암살자(들)'에 '개막작'이라는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싱가포르국제영화제의 가치에 부합하는지 다시 한번 숙고해 달라"고 요구했다.

'암살자(들)'은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벌어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소재로 한다. 수사 당국은 문세광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 냈다.

국민의힘은 서한에서 "'암살자(들)'의 소재가 된 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이라고 했다. 이어 "영화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당시 권력기관의 개입 가능성을 제기하고, 특히 피해자의 배우자인 박정희 대통령이 사건과 관련돼 있을 수 있다는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방식으로 대한민국 국민 정서에 크게 반하는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창작의 자유에 대해서는 "예술적 상상력과 창작의 자유는 존중돼야 한다"면서도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을 다룬 작품이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리고, 실제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건에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결합한다면 이는 창작의 자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했다. 국민의힘은 "영화예술의 자유와 영화제의 독립성을 존중하지만 창작의 자유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책임으로부터의 자유까지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서한에는 여론조사 결과도 담겼다. 국민의힘은 "대한민국 성인 남녀 101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8.2%가 이를 '역사 왜곡'이라고 평가했다"고 적었다.

유족과 관련 단체의 반발도 서한에 포함됐다. 서한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아들인 박지만 EG그룹 회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영화가 사건 배후에 다시 의문을 제기하는 데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과 박정희학술원, 육영재단이 공동성명으로 제작진의 공식 사과와 상영 중단을 요구했다는 내용도 들어갔다.

최민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7일 서울 여의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영화 '암살자(들)'에 관한 질의를 하고 있다.  / 뉴스1
최민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7일 서울 여의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영화 '암살자(들)'에 관한 질의를 하고 있다. / 뉴스1

국민의힘은 북한이탈주민의 증언도 거론했다. 서한은 "북한에서 생활했던 복수의 북한이탈주민들이 영화를 직접 관람한 뒤, 영화의 일부 서사와 문제 제기 방식이 북한의 대표적 체제 선전영화 '민족과 운명'의 '박정희 편'을 연상시킨다고 공개적으로 증언했다"고 적었다. 이어 "북한 독재 정권을 위한 선전영화와 '암살자(들)' 사이에서 유사한 역사적 서사를 떠올렸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국민의힘은 "'암살자(들)'을 둘러싼 문제는 더 이상 영화에 대한 단순한 호불호에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 사회의 갈등과 영화계의 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또 "대한민국 현대사가 생소한 해외 관객에게 '암살자(들)'이 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이라는 권위와 함께 소개된다면, 대한민국에서 현재 나타나고 있는 부정적인 영향이 세계적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밝혔다. 서한은 "세계의 관객에게 '암살자(들)'이 어떠한 역사적 인식을 심어줄 것인지에 대해서도 책임 있는 판단이 필요하다"는 내용도 담았다.

앞서 ‘암살자(들)’ 제작진은 지난달 28일 입장문을 내고 "특정한 역사적 결론을 새롭게 확정하거나 기존의 사실을 부정·왜곡하기 위해 제작된 영화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영화 어디에서도 특정 인물을 사건의 배후로 규정하고 있지 않으며, 영화 속 가설과 극적 설정을 역사적 사실로 제시하고 있지도 않는다"고 했다.

싱가포르 매체 아시아원은 '암살자(들)'에 출연한 유해진이 위협을 받아 경찰의 신변 보호를 받고 있다고 전날 보도했다. 아시아원은 서울 성북경찰서가 유해진에게 스마트워치를 지급하고 112 시스템에 등록했다고 전했다. 아시아원은 국민의힘이 영화제 위원장에게 개막작 철회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는 내용도 함께 실었다.

1987년 시작된 싱가포르국제영화제는 싱가포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영화제다. 제37회 영화제는 오는 21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열린다. '암살자(들)'은 21일 마리나베이샌즈 샌즈시어터에서 개막작으로 상영된다. 영화제 측에 따르면 개막작 표는 매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