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 타나실리 죽음에 대한 역사 살펴보니

2014-03-12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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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사진-이미지=드라마 '기황후' 홈페이지]지난 11일 방송된 MBC 드라마 ‘기황후’

[이하 사진-이미지=드라마 '기황후' 홈페이지]
지난 11일 방송된 MBC 드라마 ‘기황후’ 37회에서 모든 이들의 오랜 숙적이었던 연철이 죽임을 당하는 모습이 방송되면서 30%에 육박하는 시청률로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방영 초기부터 숱한 역사왜곡 논란이 일었는데, 타나실리 죽음과 관련된 역사를 살펴보면서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알아봤다.
기황후는 원나라 혜종의 황후였다. 역사학자들은 기황후가 당시 고려가 원나라에 바치는 공녀 중의 한사람이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의 주선으로 황궁의 궁녀가 되었다가 후일 원 혜종의 총애를 얻어 귀빈으로 책봉되고, 훗날 혜종의 뒤를 이어 황제로 등극하는 아들 아유르시리다르(아유시리다라)를 낳았다. 

그러나 드라마처럼 타나실리와 아유르시리다르가 동시대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유르시리다르는 1338년에 태어났고, 타나실리는 그 3년 전인 1335년에 죽는다. 타나실리는 형제들이 일으킨 '당기세의 반란'에 연루돼 사약을 마시고 처형됐다. 그래서 폐위된 황후기 때문에 시호가 없는 황후로 기록된다.
실제 타나실리는 질투가 심해 기황후를 수시로 채찍질했으며 인두로 살을 지지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타나실리 사후에도 기황후는 제1 황후가 되지는 못했다. 타나실리가 역모죄로 사사되었지만 메르키트 바얀(백안) 세력이 1340년 숙청된 뒤에야 제2 황후가 됐고, 1365년에 곤기라트 출신의 바얀 후투그 황후가 죽고 나서야 제1 황후가 될 수 있었다. 
이후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황태자로 옹립했다. 당시 기황후는 고려인 출신 환관과 관리, 일부 몽골관료들을 포진시켜 자신의 친위대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기황후는 제1 황후가 되기전에 고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기황후의 오빠 기철에게 덕성부원군의 벼슬을 주고 권세를 누리게 했다. 이 때문에 고려 공민왕의 왕권까지 위협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1356년 홍건적의 난 등으로 원나라가 약화되는 틈을 타서 기철을 비롯한 친원파 권겸 등을 숙청했다. 
이에 분개한 기황후는 1364년에 공민왕을 폐위하고 공민왕의 삼촌 덕흥군을 고려의 왕으로 세우기 위해 1만의 군사를 고려로 보낸다. 그러나 이 부대는 압록강을 건너던 중 최영과 이성계가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패하고 만다. 
이후 1368년, 주원장이 이끄는 명나라 대군 25만이 대도(현재 베이징)를 점령하자 원나라는 현재 내몽골에 있는 응창부(應昌府)로 천도하면서 작은 나라로 전락했다. 이 나라를 역사에서는 '북원'이라고 부른다. 
기황후도 이때 응창으로 이동했지만 1368년 이곳에서 명나라의 포로가 되고 1369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370년 남편인 혜종이 죽고 그의 아들 아유르시리다르가 황좌를 계승한다. 그러나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는 소종이라는 시호를 남겼지만 후사가 없어 제위는 이어지지 않았다.

기황후가 원나라의 황후가 되면서 고려에 반사적인 이익이 오기도 했다. 충렬왕 때 시작돼 80년간 지속된 공녀 징발이 폐지됐으며, 고려의 자주성을 인정하지 않고 원나라의 한 성으로 만들자는 논의가 이때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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