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도', 아는 만큼 보인다
2015-09-21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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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영화 '사도' 스틸컷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라 집안일이다"영화 '사도' 속 영조(송강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라 집안일이다"
영화 '사도' 속 영조(송강호 씨)가 한 말이다. 이 대사처럼 '사도'는 정치적 해석보다는 아버지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의 관계에 집중했다. 또한 이준익 감독의 말에 따르면 사도는 90% 이상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만든 영화다.
그렇다면 역사서에는 영조-사도세자 부자에 관해 어떤 일화가 기록되어 있을까. '사도'를 관람한 후, 두 인물의 심리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역사 기록을 모았다.
아래에는 영화 '사도'에 등장하는 사건도 있고 다뤄지지 않은 사건도 포함돼 있다.
아버지 영조: #콤플렉스 #무한기대 #못마땅 #권력욕
많은 중장년층은 '영조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자수성가한 아버지가 영조와 같이 권력을 쉽게 놓지 못하고, 아들에 대해서는 못마땅하고 부족하다며 질책하는 경우를 종종 봤다고 말한다.
1. "41세에 얻은 귀한 내 아들!"
영조의 첫째 아들이었던 효장세자가 9세에 세상을 떠났고, 7년 뒤 둘째 아들(사도세자)이 태어났다. 41세로 나이가 적지 않았던 영조는 세자가 태어났을 당시 매우 기뻐했다.
영조는 후궁 영빈 이씨가 낳은 둘째 아들을 즉시 중전의 양자로 들이고 원자로 삼았다. 또한 이듬해에 그를 바로 왕세자(왕위를 이을 왕자)로 책봉했다. 사도세자는 조선 역사상 최연소 왕세자였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12년 3월 15일)
2. "쯧쯧" 아들의 무인적 기질을 못마땅해한 아버지
학문과 예법을 매우 중시했던 영조는 아들의 공부에 관심이 많았고 기대도 무척 컸다. 그러나 세자가 무인적 기질을 드러내자 못마땅해 했다.
하루는 영조가 "중국의 한 문제와 무제 중 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 세자가 "문제"라고 답하자 영조는 믿지 않으며 화를 냈다.
영조는 "네가 지은 시에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虎嘯深山大風吹)'는 구절이 있다"며 "기가 매우 승하다는(어떤 특성이 두드러지다) 것을 알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영조 24년 5월 19일)
또한 영조는 아들의 기질을 살려주기 보다 더욱 엄격하게 학문을 익히도록 강요한다. 그는 세자가 어느 날 서연을 하고 어느 날 무슨 책 무슨 편을 읽었고, 어느 날은 하지 않았는지 등을 상세히 기록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영조 31년 9월 10일)
세자는 이에 엄청난 중압감을 느꼈고 아버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3. 출생 콤플렉스와 권력욕
무려 52년이라는 재위 기간(조선 왕조 역대 임금 중 최장 기간)이 상징적으로 말해주듯 영조는 권력욕이 강한 인물이었다. 이에 더해 영조의 어머니는 무수리 출신이자 숙종 후궁이었던 숙빈 최씨다. 그는 출생에 콤플렉스가 있었으며 이복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에 끝없이 시달렸다.
아버지의 권력욕과 콤플렉스는 아들인 세자를 괴롭게 했다.
"나는 왕위에 미련이 없다"를 보여주고 싶었던 영조는 종종 양위(임금이 왕위를 물려주는 것)를 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때마다 세자는 "명을 거둬달라"고 아버지에게 애원해야 했다.
영조 28년에 영조는 또 다시 양위하겠다고 밝혔고 세자는 빌었다. 그러자 영조는 "내가 시를 읽을 것인데, 네가 눈물을 흘리면 효성이 있는 것이므로 내 마땅히 너를 위해 내렸던 전교를 거두겠다"고 말한다. 다행히 세자는 시 마지막 부분에서 엎드린 채 눈물을 줄줄 흘렸다. (영조 28년 12월 14일)
또한 영조 30년에도 영조는 상소 하나를 트집 잡아 세자를 크게 꾸짖었다. 세자는 석고대죄를 두 번이나 했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용서를 구해야 했다.
영조는 계속해서 세자의 효심을 시험했고 크게 꾸짖는 날이 많았다.
아들 사도세자: #공포심 #회피 #광기
사도세자에게서 아버지에게 반항하면서도 인정받고 싶어하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자식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옆에서 바라만 보기에도 위태로운 '광인'이 되어가는 사도세자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1. "아버지? 공포 그 자체"
호된 꾸지람이 반복되자 세자는 영조에게 늘 위축되어 있었고 아버지를 두려워 했다.
영조 33년, 세자는 자신의 뉘우침을 받아주지 않는 아버지에게 불려가 이야기를 나눈 뒤, 돌아오는 길에 기절해 버리기도 했다. (영조 33년 11월 11일)
또한 그해에 세자는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세가 있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렇게 된다"며 극심한 불안 증세를 밝히기도 했다. (영조 31년 4월 28일)
2. 아버지에 대한 공포는 무서운 광기로
영조: 어찌하여 사람을 죽이느냐
세자: 심화(마음 속에서 북받쳐 나는 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 같은
짐승을 죽여야 마음이 풀립니다
영조: 어찌 그러하느냐
세자: 마음이 상하여 그러하나이다
한중록에 기록된 영조와 세자의 대화다.
또한 한중록에는 사도세자가 내관, 궁녀 등을 잔혹한 방법으로 매질하거나 살해했다고 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세자는 한 내관을 살해한 다음 내관의 머리를 들고 돌아다니기도 한다.
한중록은 사도세자의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씨가 쓴 회고록으로 '자신의 가문을 위해 쓴 책이다', '왜곡이 많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그러나 이외에도 많은 역사서가 사도세자의 살인을 언급하고 있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신하 나경언이 올린 글을 읽은 후 영조가 세자의 살인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영조 38년 5월 22일)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에 행역하고, 북성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뿐만 아니라 세자는 '의대증'이라는 강박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의대증은 옷을 잘 입지 못하는 병이다. 한중록에는 세자가 한 번 옷을 입으려면 20~30벌을 준비해 두어야 했으며 옷 시중을 잘 들지 못한다며 그가 사람을 해치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