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 이완용'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7가지

2016-01-02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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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wikipedia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을사오적'을 전부 읊어달라고 해보자.

이하 wikipedia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을사오적'을 전부 읊어달라고 해보자. 

'을사오적'이란 1905년 한국의 외교권 박탈이 주 내용이었던 '을사늑약' 체결 당시 조약서에 서명한 박제순(외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 권중현(농상부대신) 다섯 명을 일컫는다. 

5명 모두 아는 사람을 찾기 힘들 것이다. 2명만 말해도 대단하다. 하지만 한 사람만은 거의 언급한다. 바로 '이완용'이다.   

이완용(1858~1926)은 '친일파', '매국노'의 대명사다. 하다 못해 옆나라 중국에서도 세계의 대표적 매국노로 '이완용'을 꼽았다.  

하지만 그 유명세와 달리 이완용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면이 많다. 

이완용에 대한 의외의 사실 7가지를 소개한다. 

1. 일본어를 전혀 못했다 

 

일본어를 전혀할 줄 몰랐다. 대신 영어는 잘했다. 일본인과 대화할 땐 늘 영어나 통역을 썼다. 이완용은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 졸업생이다. 여기서 영어 실력을 키웠다.  

2. 독립문 현판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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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지 않겠지만,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문에 달린 '독립문(獨立門)' 현판을 직접 썼다고 전해진다. 여러 사료에 따르면, 이완용은 당대 최고의 명필 가운데 한 명이었다. 

3. 대한민국 최초로 의무 교육제를 도입시켰다 

이하 Pixabay

 

1888년 초대 주미공사관(현 주미 한국 대사관) 공사관원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간 그는 자본주의, 민주공화제, 신분 없는 평등 사회에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근대적 교육제에 깊이 매료됐다. 이때의 경험이 대한민국에 최초로 의무 교육제를 도입하는 데 밑바탕이 됐다고 알려졌다. 

4. 전라도가 고향이 아니다 

 

풍문처럼 떠돌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완용은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 백현리(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태어났다. 

5.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다

 

친미파였다. 주미 공사관 공사관원으로 미국에서 생활한 게 그를 '친미파'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 이어 '친러(러시아)'파로 변신했다가 러일전쟁(1904~5)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둔 이후 '친일파'가 됐다. 

6. 성균관대학교 대사성(현 총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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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성(大司成)'은 지금의 '총장'같은 위치다. 조선시대 서열 '5위'인 정3품의 벼슬로 성균관을 총괄했다. 다만 조선 말기 대사성의 직위는 급락해 큰 의미가 없는 자리가 됐다. 

7. 관상이 상당히 좋았다

JTBC '이영돈 PD의 논리로 풀다'

 

일설에 따르면 이완용은 관상이 상당히 좋았다. '천재'의 상이었다고 한다. 재물도 많이 모을 팔자였다. 흥미로운 건 그와 정반대의 관상을 가진 동시대 사람이 있었다. 바로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이다. 한 사람은 친일파가 됐지만, 한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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