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그램으로 만드는 '유령 집회' 체험기
2016-02-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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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phy"집회 시위 자유를 원하는 영혼들 여기 다 모이셨습니까? 한국에서 집회 시위 자유
"집회 시위 자유를 원하는 영혼들 여기 다 모이셨습니까? 한국에서 집회 시위 자유에 대한 권리가 유령이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 유령들이 여기 모였습니다. '유령 집회,' 신나는 판을 열어봅시다!"
지난 12일 오전 11시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있는 사야 스튜디오에는 유령이 모여들었다.
진짜 유령이 아닌, 유령이라도 되고 싶은 일반인들이다. 교통 혼잡 등을 이유로 집회가 금지된 거리에는 사람이 아닌 유령만이 집회를 할 수 있다는 발상으로 시작된 '02.24 앰네스티 유령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사실 '집회' 보다 '유령'이라는 말에 더 끌렸던 필자도 직접 유령이 되고자 촬영장을 찾았다.
건물 지하에 있는 스튜디오는 70평(231㎡) 남짓한 규모였다. 일반 스튜디오와 달리 천장과 벽면, 바닥까지 온통 초록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색 차이를 이용해 피사체를 뽑아내는 촬영 기법인 ‘크로마키’ 전용 공간이다.
현장에는 이미 서른 명이 넘는 스태프와 참여자가 촬영을 하고 있었다. 시위 참여자 6명은 피켓을 들고 “집회의 자유 보장하라! 보장하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구호를 부르며 스튜디오 끝에서 끝을 오갔다.

'유령은 어딨지...? 이건 너무 진지하잖아.' 촬영장에서 느낀 첫인상이었다. 무거운 메시지와 진지한 분위기, 2시간 정도 지연된 일정은 촬영이 쉽지 않음을 예고하는 듯 했다.
유령이 되기를 자처한 사람들
대기하는 동안 참여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위안부 소녀상' 철거에 반대하며 직접 그림을 그려온 이지원(26) 씨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미대생으로서 '홀로그램' 집회에 관심도 있고 다른 집회에 참여하는 이들과 교류하고 싶어 '유령 집회'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한일협상을 규탄하는 내용의 피켓을 직접 그려온 대학생 이지원(26) 씨.
수요 집회는 정기적으로 열리고 집회에 대한 자유도 지켜지는 편이 아닌가 궁금했다. 이 씨는 “수요 집회는 경찰에서 계속해서 허가를 해주지만, 여전히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침해받는다는 생각을 해왔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는 "국내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규정에 주요 정부기관이나 대사관, 문화재 근처는 모두 시위를 금지하고 있는데, 그보다 우선 될 것은 ‘시민의 저항권’이라고 생각해왔다"며 "최근 한일 위안부합의 이후 농성에 대한 제약이 더 많아졌다"고 덧붙였다.
대기실에는 앳된 얼굴도 보였다. 동네 선후배가 모인 카톡방에 '유령 집회' 링크를 보냈다는 여고생 김유진(18) 양과 '친구 따라 시위 온' 대학 새내기 문재연(19) 씨다.
고3 수험생이 되는 김유진 양에게 '유령 집회'에 참여하게 된 계기에 관해 묻자, 그는 지난해 4월 '세월호 1주기' 집회에 참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김 양은 “학교에서 아이들이랑 그 시간(세월호 참사 당시) 떠들고 놀고 있었는데 그런 사고가 나서 슬펐다"며 "어른들이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는 모습을 보고 ‘저런 건 배우지 말아야지’라는 마음으로 세월호 1주기 집회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어 “(집회 당시) 친구 20명과 헌화하러 가는 길에 경찰이 차 벽을 세우고 ‘폭력적인 집회를 중단하라’고 우리에게 말했다”며 “공권력으로부터 그런 취급을 받으니 ‘평화 시위’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02.24 유령 집회'에 참여한 여고생 김유진(18), 대학생 문재연(19) 씨가 피켓을 들고 있다.
이들과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유령 집회'에 참여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유령 집회는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담은 피켓도 만들었다.

초록색 스튜디오 중심에서 '집회는 인권이다'를 외치다.
마침내 필자가 속한 B조 촬영 차례가 왔다. 감독의 ‘큐’ 사인과 함께 다른 참여자들과 “평화 시위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카메라 앞을 걸었다.
열 개가 넘는 조명과 카메라, 스태프가 지켜보는 앞에서 걸으려니 영 어색했다. 대열 가장 앞자리에 섰던 탓에 카메라 밖으로 빨리 빠지지 않아 NG를 내기도 했다.
행진 다음은 선언문 낭독 장면이었다.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사 김희진 사무처장과 일반인 참가자 발언을 할 때 이에 호응하는 장면을 찍었다.
"집회 시위 자유를 원하는 영혼들 여기 다 모이셨습니까? 한국에서 집회 시위 자유에 대한 권리가 유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유령들이 여기 모였습니다. 우리 모두 준비해온 피켓과 도구를 신나게 흔들면서 '유령 집회' 신나는 판을 열어봅시다"
앞선 대화와 때문인지 어색함은 사라지고 모두 시위에 참여한 것처럼 구호를 외쳤다. 집회는 '인권'이라는 말도 조금씩 와 닿기 시작했다.

'유령집회' 참여자들이 홀로그램 영상용 촬영을 하고 있다. 연설문을 듣는 시위대 모습.
'02.24 앰네스티 유령 집회' 기획자와 아트디렉터에게 듣는 '홀로그램 집회'
홀로그램 집회는 지난해 4월 세계 최초로 스페인에서 처음 시도됐다. 시민 운동단체인 '홀로그램 포 프리덤'은 스페인 정부가 공공건물 주변 시위를 막는 법을 통과시킨 데 항의하는 차원에서 홀로그램 시위를 기획했다.
국제 앰네스티 한국 지부가 이번 ‘유령 집회’를 기획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지난 1월 마이나 키아이(Maina Kiai) 유엔 특별보고관은 ‘평화적 집회와 결사의 자유’ 조사차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헌법에서 명시한 집회와 결사 자유가 한국에서는 사실상 후퇴했다고 언급했다.
이에 인권 단체인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는 “집회도 인권이다”라는 의미를 담아 오는 24일 박근혜 정부 출범 3주년을 앞두고 청와대 인근에서 집회를 기획했다. 하지만 경찰은 ‘교통 방해’ 등을 이유로 불허 했다. 이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집회 대신 홀로그램 영상을 트는 ‘유령 집회’를 기획하게 됐다.
이번 ‘02.24 앰네스티 유령 집회’는 앰네스티가 홀로그램 전문가인 양덕용 아트디렉터에게 직접 의뢰했다. 재밌는 작업에 대한 열정과 취지에 상당 부분 공감해 참여하게 됐다고 전했다.

이날 촬영된 영상은 사람마다 윤곽선을 따는 작업을 하게 된다. 다시 CG(컴퓨터 그래픽)를 입혀 홀로그램 콘텐츠로 구현하게 된다. 완성된 홀로그램 영상으로 진행되는 '02.24 앰네스티 유령 집회'는 오는 24일 저녁 7시 30분 광화문 북측 광장에서 30분 동안 상영된다.
*사진, 영상 = 전성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