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에 대해 당신이 꼭 알아야 할 사실 9가지
2016-02-2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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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따지면 '위안부'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엄밀히 따지면 '위안부'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위안'은 "위로하고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이 자행한 범죄는 이런 의미와 거리가 멀다. 위안부 여성들은 하루에도 수십 명씩 일본군을 상대했다. 이 과정에서 폭행과 학대가 밥 먹듯 이뤄졌고, 사망자도 상당수 발생했다.
해외에서는 "일본군 성노예(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라는 단어를 쓴다. 반면 피해 당사국인 한국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명칭을 쓴다. 작은 따옴표는 위안부가 일본 정부 측 용어임을 강조하려 표기한 것이다.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공식 용어로 정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성노예'라는 직설적 단어에서 피해 할머니들이 느끼는 부담감이다. 둘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명칭에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행한 전쟁범죄"라는 의미가 담겼기 때문이다.
위안부에 대해 꼭 알아야 하는 사실 9가지를 소개한다.
1. 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르다

정신대는 일제가 특별한 목적으로 강제 징발한 사람들을 뜻한다. 정신대는 남녀 모두 징발 대상이었고, 농촌정신대·보도정신대·의료정신대 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이 가운데 '여성정신대'라는 미명 아래 일본군 위안소로 끌고 간 피해 여성을 '위안부'라고 불렀다. 즉, 정신대는 위안부보다 넓은 개념이다.
2. 일제 위안부 피해자 수는 최대 20만 명으로 추정 중이다

위안부 연구 권위자인 '요시미 요시아키(よしみよしあき)' 주오대학 교수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수는 최소 8만, 최대 20만 명에 이른다. 이는 국내를 포함해 전 세계 위안부 피해자를 추정한 수치다.
3. "한국군도 위안부를 운영했다"는 주장이 있다
김귀옥 한성대 교수가 2002년 '한국전쟁과 여성: 군 위안부와 군 위안소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제기했다.
논문에 따르면 과거 일본군, 관동군 출신 한국군이 한국전쟁(6·25) 당시 일제가 운영한 위안소와 비슷한 시설을 운영했다. 이 시설은 전국에 분포해 있었다고 한다.
4. 위안부 문제는 1990년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1924~1997)가 국내 최초로 위안부 피해 증언을 하며 알려졌다. 문제가 본격화한 지 채 25년도 안됐다.
2012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초국적 단체 '아시아연대회의'는 김 할머니의 용기 있는 고백을 기리기 위해 8월 14일을 '세계 위안부의 날'로 정했다.
5. '평화의 소녀상'에는 여러 의미가 숨어있다

'평화의 소녀상'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2011년 수요집회(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를 위해 열리는 집회) 1000회를 맞아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세운 동상이다.
'평화의 소녀상'은 광주, 대전, 울산 등 전국 각지와 해외에도 있다.
평화의 소녀상에는 여러 의미가 숨어있다. 대표적으로 일본대사관 앞 평화상 왼쪽 어깨에 앉은 작은 새는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상징물이다.
또 이 평화상 옆에 있는 빈 의자는 세상을 떠났거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자리라는 뜻이다.
6.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본명과 한국어까지 잊은 피해 할머니가 있다

'훈 할머니'로도 불렸던 고 이남이 할머니는 16살 때 위안부로 전장에 끌려간 뒤, 당시 트라우마로 자기 이름과 우리말까지 잊었다.
1941년 징발된 이 할머니는 모진 학대에 시달리다 캄보디아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할머니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현지 남성을 만나 거기서 50여 년을 더 살았다.
할머니의 사연이 알려진 건 1996년 초여름이었다. 사업차 캄보디아에 들렀던 한국 남성이 우연히 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세상에 알렸다. 이 소식은 해외 통신사 AFP와 ‘한국일보’ 등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이듬해, 이 할머니는 고국으로 돌아와 혈육 찾기에 나섰다. 하지만 고향이 ‘진동’이었다는 것 외에 아무 기억도 하지 못했다.
1997년 한 지방지 기자가 취재 끝에 이 할머니의 본명(이남이)과 고향(경남 마산 진동면), 막내동생을 찾았다. 유전자 검사로 동생이 이 할머니의 혈육임을 확인했다. 이 할머니는 막내동생과 짧은 만남을 갖고, 같은 해 캄보디아로 돌아갔다.
이 할머니는 2001년, 캄보디아에서 향년 81세로 별세했다.
7. 일본군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도라지 꽃'이라 불렀다
일제 관동군 사령부에서 "성경험이 없는 16~19세 조선 여성"을 '도라지꽃'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꽃다운 나이’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8. 북한에도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있다
평안남도 강서군에 살았던 박영심 할머니(1921~2006)가 대표적이다. 박 할머니는 태평양 전쟁 당시 연합군이 촬영한 사진 속에 유일하게 임신부 모습으로 있어 눈길을 끈 할머니다.

1998년 북한 당국에 신고한 위안부 피해 여성 숫자는 260여 명이었다. 현재 생존자는 몇명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9. 김외한 할머니는 만 11살 때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징발됐다
일본군은 초경도 아직 안 한 어린 소녀까지 강제 징발해갔다. 김 할머니는 지난해 6월 향년 80세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