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흔적을 찾아서 수원 화성으로 떠난 청소년 Volun-tour 탐방단
2016-04-05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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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Volun-tour 탐방단 수원화성을 가다

지난 4월 2일 토요일, 조선시대 계획 신 도시 수원화성을 문화유산국민신탁 청소년 Volun-tour 용인, 수원지역 탐방단 단원들이 찾았다.
평소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창문 밖으로 보았던 수원 화성을 대학생 멘토와 함께 탐방하였다.
특히, 이번 수원화성 탐방에 참여한 구민석 대학생 멘토는 수원 호매실고등학교 재학 시절 교내 역사동아리 활동으로 수원화성에 대하여 탐구하였으며, 문화유산국민신탁 답성놀이 프로그램 당시 직접 안내해설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시절 수원화성 탐방에서 안내해설을 하는 구민석 군(위) / 대학생이 되어 후배들에게 수원화성을 안내해설을 하고 있는 구민석 멘토(아래)]
문화유산국민신탁 활동을 하고 있는 현예준입니다.
오늘 4월 2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수원 화성에 다녀왔습니다. 다들 열심히 하는 것 같아 저도 덩달아 즐겁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완연한 봄이 되어가는 4월 초반에 저는 친구들과 함께 수원에 있는 화성에 다녀왔습니다. 뜨거운 햇빛이 내려옴에도 같이 있던 10명 남짓한 친구들이 불평 없이 열심히 걸어 역사를 탐방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습니다.
저희는 화성 남쪽에 있는 문인 팔달문부터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수원 화성 전체로 보았을 때, 팔달문은 서울의 숭례문처럼 전체 도성의 남문으로 여겨졌습니다. 보통 남쪽 문은 도성의 정문 역할을 하지만, 예외로 수원 화성은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 이유는 정조가 수원보다 북쪽인 서울에서 행차하여 내려오기 때문이었습니다. 팔달문 다음으로 저희가 원래 가야 하는 곳은 팔달산 높은 곳에 있는 서장대였습니다. 하지만 공사로 서장대 방향으로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어쩔 수 없이 바로 북쪽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멈춘 장소는 ‘서일치’였습니다. 서일치는 가까이에서 접근하는 적들을 공격할 수 있는 시설로, 성곽에서 튀어나온 부분에 있는 공격 시설이자 방어 시설이었습니다. 이 서일치에서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있었는데, 이는 적들의 공격을 확인하기 위한 시야 확보 수단이었습니다. 또 아래로 비스듬하게 뚫려 있는 구멍은 아래로 올라오는 적을, 평평하게 뚫려 있는 구멍은 정면에서 오는 적들을 보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이어 서북각루를 지나, 수원 화성의 서문인 화서문에 도착했습니다. 화서문은 수원의 가장 외진 곳에 있다고 알려진 대문으로, 4대문 중 가장 복원이 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문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수원 화성 성문의 특징인 옹성에 대해 배워보았습니다. 옹성은 항아리를 반으로 갈라놓은 모양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는데, 성문을 잘 부수지 못하게 할 수 있고, 침략한 적들을 한 곳에 몰아 섬멸할 수 있는 기능을 가졌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화서문을 지나, 북서적대에서 잠시 가던 길을 멈추었습니다. 북서적대는 치와 달리 튀어나기도 하고, 약간 높은 지형을 가진 공격 시설이었습니다. 북서적대 다음에는 바로 이 화성의 정문인 장안문이 있었습니다. 장안문은 크기도 크지만 왕이 행차하는 건물이라 보안 유지를 위해 문 안을 가려놓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화홍문을 지나 방화수류정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이 화성은 두 번째로 와보지만, 역사적 가치가 풍부하고 자연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다시 되짚어볼 수 있었습니다. 정조가 개혁 정치에 중심지로 삼고자 했던, 그리고 기존 노론 세력을 뒤엎고 자신의 왕권을 강조하고자 했던 정조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소망과 의지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본 후기 기사는 청소년 Volun-tour 3기 탐방단원 죽전중 현예준 대원 후기를 토대로 작성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