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 래퍼'들은 어디로 갔을까
2016-06-1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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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방송을 시작한 Mnet 래퍼 서바이벌 프로 '쇼미더머니5'는 평균 시청률 2.3
지난 5월 방송을 시작한 Mnet 래퍼 서바이벌 프로 '쇼미더머니5'는 평균 시청률 2.3%(TNMS 제공)를 기록하며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쇼미더머니 인기에서 보듯,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힙합 장르가 지금처럼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적은 없다. 힙합 레이블인 AOMG, 일리네어 등은 내는 음반마다 실시간 차트 1위를 차지하고 고가의 콘서트도 매회 빠르게 매진된다.

Mnet은 지난해 1월 '쇼미더머니' 인기에 힘입어 여성 래퍼들만 출연하는 '언프리티 랩스타'를 시작했다.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래퍼 제시, 릴샴, 졸리브이, 키썸, 치타, 육지담 등이 출연해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방송이 끝난 후 몇몇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는 행보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현재 방송에 출연 중인 일부 래퍼들 역시 음악이 아닌 예능 프로그램에서 얼굴을 볼 수 있다.
힙합과 좋은 친구들이라는 강연으로 힙합 문화를 알리고 있는 음악 평론가 김봉현 씨는 "'언프리티 랩스타'라는 타이틀은 많은 시사점을 안긴다. 여성 래퍼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에 굳이 '언프리티'라는 단어를 붙인 건 '프리티'라는 단어를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는 외모로 승부하지 않아. 오직 실력으로만 승부할 거야'라고 외치는 듯한 타이틀은 남성 우월적인 힙합의 세계에서 여성 래퍼들이 근본적으로 처한 입장을 드러낸다"고 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힙합 플레이야와 힙합LE 게시판에서는 '여성 래퍼'들 이름은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간혹 올라온 글에선 "한국 힙합 음악계에서 여성이 인기를 얻기란 쉽지 않다. 랩을 잘한다 해도 남성 래퍼들과 차이를 보인다", "여성 래퍼들은 톤이라던가 플로우가 다 비슷한 것 같다" 등의 의견을 볼 수 있다.

이들은 과거 힙합씬에서 이름을 날렸던 래퍼 리미 등 걸출한 여성 래퍼가 출현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왜 이런 '거물급' 여성 래퍼를 찾기가 힘든 걸까.
언더그라운드 래퍼로 활동했던 A씨는 대중들에게 각인된 여성 래퍼 이미지가 있다고 했다. 그는 "대중들은 여성 래퍼하면 윤미래 씨와 리미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며 "그 정도 기대치를 맞추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대중들은 만족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A씨는 언프리티랩스타에서 윤미래 씨와 비슷해 화제가 됐던 래퍼 트루디를 꼬집었다. 그는 "여성 래퍼들을 향한 대중 이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 트루디다. 트루디는 윤미래 복사기라고 불렸다. 그런데 프로그램이 끝나버리자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김봉현 평론가는 "최근 방송에서 인기를 얻은 여성 래퍼들은 윤미래 씨나 리미와는 그 결이 사뭇 다르다. 다시 말해 윤미래 씨나 리미와 달리 그들에게는 작품이 없기 때문에 '진지한 음악적 평가' 자체를 할 수 없다"며 "이들에게는 아티스트로서 어떠한 철학과 태도를 지녔는지 알 수 있는 정규 앨범이 없다"고 했다.
실제로 언프리티 랩스타에 나왔던 래퍼 23명 중 걸그룹 멤버를 제외하고 정규 앨범을 내놓은 래퍼는 없었다.
일부에서는 방송사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여성 래퍼들이 갇혀버렸다고 했다.
한 여성 래퍼 B씨는 "근복적인 원인은 여성 래퍼들 랩이 대중을 사로잡지 못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속을 깊숙히 들여다보면 방송에서 만들어진 여성 래퍼들 이미지도 한몫 한다"고 했다.
B씨는 "언프리티 랩스타에서 여성 래퍼들이 주목을 받은 것은 몸매, 외모, 유명한 남자친구였다. 그런 데 익숙해진 대중에게 음악만으로 어필하기에는 힘든 점도 있다"고 했다.
지난 2일 앨범 '콜로서스(COLOSSUS)'를 발매한 여성 래퍼 슬릭(25)은 한국 힙합계에 존재하는 '브라더후드(Brotherhood)' 문화도 넓게 보면 여성 래퍼들에게 진입 장벽이 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 힙합씬이 정말 좁은 편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놀다가 음악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술자리에서 보통 친해지고 그런다. 저는 친하다고 해서 작업을 같이 하기 보다는 작업물을 들어보고 비즈니스적으로 접근한다"고 했다.
이어 그는 "힙합 음악 뿐 아니라 음악을 자세히 들어보면 남성 화자가 남성 중심적으로 쓴 가사들이 많다. 여성이라서 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슬릭은 여성 래퍼와 남성 래퍼를 굳이 나눌 필요가 있냐는 반문을 제기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제대로 들려주면 그걸로 충분한 것 같다"며 "여성 래퍼라서 프로그램이 따로 생긴걸 보면 때로는 혜택을 얻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슬릭은 여성 래퍼들이 처한 한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결국 '결과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봉현 평론가 역시 이 문제를 여성 래퍼 문제로만 볼 게 아니라 쇼 엔터테인먼트 최전선에 있는 래퍼 대부분이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고 했다.
그는 "한국 래퍼들은 래퍼인 동시에 아티스트로 불린다. 그러나 여성 래퍼들에게서 아티스트가 가진 면모를 찾아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며 "다양한 포지션에 포진된 남성 래퍼들과 달리 현재 각광받는 여성 래퍼들은 대부분 쇼 엔터테인먼트 최전선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 남성 래퍼들과 다르다면 다르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