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째 악용·역차별 논란, '대학 생리공결제'
2016-10-05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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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통이 너무 심해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진단서 가져와도 결석 처리되나요?"

"생리통이 너무 심해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진단서 가져와도 결석 처리되나요?" / 이하 위키트리
'그날'이다. 하필 1교시가 있는 날인데, 자고 일어나니 생리가 시작됐다. 배는 찢어지게 아팠고, 핏덩어리가 '꿀렁꿀렁' 나왔다. 생리 때만 되면 열은 왜 이렇게 나는지,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팠다. 생리 때마다 열이 38도 넘게 나서 여러 번 병원도 찾았지만 그때마다 의사들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학교에 갈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FA 제도(결석 허용 한계를 초과해 결석하는 경우 해당 과목을 낙제 처리하는 제도) 때문에 별도리가 없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강의실에 앉았다. 교수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아랫배가 아프다 못해 상체와 하체가 분리될 것만 같았다.
쉬는 시간 남자 조교를 찾아갔다. 그 와중에 남자 조교에게 '생리'라는 말을 꺼내는 게 부끄러웠다.
"생리통이 너무 심해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진단서 가져와도 결석 처리되나요?"
조교는 무심하게 답했다. "규정상 며칠 입원해야 병결 처리가 가능하다". 며칠 입원이라니, 생리는 며칠 후면 끝난다.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윤 모(여·26) 씨가 2011년 5월 겪은 일이다. 윤 씨는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리통으로는 병가를 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아파도 참았다. 부끄러워 생리통이라는 말도 못했다. 친구들과 이야기해보니 나 말고 다른 친구들도 이렇게 학교를 다니고 있더라"라고 말했다. 그는 "생리공결제가 왜 필요한지 생리 때마다 체감한다"고 했다.
생리공결제란 여학생이 생리통으로 결석할 경우 한 달에 한 번 공적인 결석으로 처리하는 제도다.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로 교육부는 2006년 3월 전국 초중고등학교에 생리공결제를 도입했다. 대학은 권고 대상으로 남았다. 당시 경희대, 중앙대 등 필요에 공감한 상당 수 대학이 생리공결제를 시행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대학교 생리공결제는 얼마나 자리 잡혔을까.

위키트리 디자이너 김이랑(@goodrang)
위키트리가 지난 23일 서울 주요 10개 대학(고려대, 경희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 이화여대, 중앙대, 한국외대, 한양대) 생리공결제 도입 여부를 취재한 결과, 이중 5개 대학이 생리공결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서울대, 성균관대, 서강대 그리고 10개 대학 중 유일한 여자대학인 이화여대는 생리공결제가 없었다. 한국외대는 경영대 등 일부 학과가 자체적으로 운영 중이다.
이들이 생리공결제를 도입하지 않는 이유로는 '악용'과 '역차별' 우려가 가장 많이 거론됐다.

연세대는 연달아 이틀까지 생리공결이 가능하다. 단 교수 재량이라 일부 교수는 병원 확인서를 요구하기도 한다
서울대 학내 매체 서울대저널이 지난 2007년 설문 조사를 한 결과에 따르면, 생리공결제에 찬성한 서울대 학생은 77%나 됐다. 남학생 찬성률도 69.8%에 달했다. 이처럼 생리공결제 도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서울대는 결국 생리공결제를 도입하지 못했다. '제도 악용 가능성', '권리 과잉 주장'이라는 반대 의견을 불식시킬 구체적인 시행 지침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강대는 2007년 생리공결제를 시행했다가 3학기 만에 폐지했다. 교학위원회 조사 결과 생리공결제가 일반 결석 대체 수단으로 악용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였다.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홍익대 10학번 정 모(남·25) 씨는 "생리통은 개인차가 커서 안 아픈 여성도 있을 텐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한 달에 한 번 씩 합법적으로 강의를 빠질 수 있는 건 특혜인 것 같다"며 "출결이 학점에 영향을 많이 미치는데 부득이하게 빠지게 될 경우 여학생들은 생리 결석으로 대체할 수 있지 않냐"고 반문했다.

서강대는 악용을 우려해 2008년 생리공결제를 폐지했다. 시행 3학기 만의 결정이었다.
생리공결제를 시행하고 있는 대학들도 이런 우려와 반박을 잠재우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려대 철학과 14학번 이 모(여·21) 씨는 학내에 붙었던 대자보 내용을 언급했다. 이 자보에 따르면, 어느 교수는 수업 시간에 “여학생들 유고 결석 너무 자주 쓰는 것 같은데 악용하지 마라. 딱 학기에 한 번만 허용하겠다”고 엄포했다고 한다.
이 씨는 “생리공결을 쓰면 남학생 대부분 아파서 빠진 게 아니라 그냥 수업을 빠진 거라고 인식한다”며 생리공결제 사용이 어려운 학내 분위기를 전했다.

우려가 사그라들지 않는 데엔 생리공결제를 악용하는 일부 여학생들 책임도 있다. 지난 23일 연세대에서 만난 13학번 김 모(여) 씨는 “솔직히 ‘그날’이라 사용한 것보다 그냥 사용한 경우가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14학번 남 모(여) 씨도 "주변에 악용하는 친구들이 없다고는 말 못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생리공결제를 유용히 쓰는 학생이 훨씬 많다는 점을 강조했다. 보완이 필요할 뿐 폐지해야 할 제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앞서 언급한 연세대 13학번 김 모 씨는 "남용하는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생리공결 자체가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실제로 생리통이 심해 수업 듣기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고등학교 때도 있었다. 이런 게 콤플렉스가 될 수도 있다"며 "제도적으로 남용할 수 없도록 보완돼야 할 문제이지, 없애야 하는 건 아니다"라 말했다.
서울대 미학과 11학번 김 모(남·26) 씨는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건강 문제를 참고 견디라고 하는 대학과 남용 가능성을 감수하고라도 건강할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대학 중 후자에 다니고 싶다"며 생리공결제를 찬성했다.
고려대 행정학과 10학번 김 모(남·26) 씨도 "강의를 한 번 빠지면 진도 따라가기가 어렵다. 매달 생리 공결을 쓰는 여학생들한테는 해결 방안이 필요한 것 같다"며 "생리공결제 도입을 두고 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 대안을 상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도적으로 남용할 수 없도록 보완돼야 할 문제이지, 없애야 하는 건 아니다" 김 모(여·연세대 13학번) 씨/ 이하 위키트리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전문의는 여성 건강 차원에서 생리공결제 필요를 강조하며 "생리 주기 중 언제 가장 힘든지, 언제 공결이 필요한지에 유동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생리할 때 오래 앉아있으면 자궁혈이 잘 배출되지 않는다. 이는 자궁내막증 같은 질환을 유발하고 생리통을 더 심하게 한다. 불임이나 조산 원인이 되기도 한다"며 "때문에 여성은 생리기간 동안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운동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증상이 없는 사람, 배란통이 심한 사람, 생리 전 증후군이 심한 사람, 생리통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거나 응급실까지 실려오는 사람 등 생리통은 개인차가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개인차가 크기 때문에 생리공결제가 필요없다는 주장이 아니라, 개인차가 크기 때문에 유동적으로 생리공결을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 "생리 주기 중 언제 가장 힘든지, 언제 공결이 필요한지에 유동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생리공결제를 두고 이런저런 말이 오가는 것은, 한국에선 기본적으로 강의 출석 여부가 학점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출석이 점수와 상관없다면, 자신이 아프면 그냥 빠지면 되니까 생리공결제라는 제도 자체가 생길 필요가 없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닌 김 모(여·28) 씨는 "출결 자체가 성적에 반영되는 경우는 드물었다"며 "굳이 생리공결제라는 제도가 따로 있지 않아도 생리 등 개인 사정으로 결석하는 일이 당연하게 허용됐다"고 했다. 출결은 학생 개인의 책임이고 권리이기 때문에 학교가 관여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중국 베이징대를 졸업한 이 모(여·27) 씨 역시 "중국에서는 생리공결이라고 할 것 없이 생리통으로 병가를 쓸 수 있었다. 병가를 썼다고 성적에 불리함을 받는 일은 없었다. 한국에서 생리공결제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게 낯설다"고 전했다.
병원 진단서 등으로 확인이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선 결국 '생리 공결제'가 일부 악용될 가능성은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소수 여학생 때문에 이 제도를 꼭 필요로 하는 대다수 여학생들까지 피해를 입혀선 안된다는 논리다.
또한 월 1회 생리 공결을 한번 악용하면, 실제 생리 때는 사용하지 못해 자연스럽게 남용을 막을 수 있다는 얘기도 있다.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노지은 박사는 '생리 공결'을 여성이 받는 '특혜'로 받아들여선 안된다고 주장한다.
노 박사는 "한국 사회는 월경을 병리화 즉 질병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 국가인권위에서 생리공결제를 권고한 이유는 (생리통 때문만이 아니라) 여성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며 "생리공결제는 월경에 대한 보편적 권리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월경은 개별적 현상일뿐 아니라, 평균 12~50세 가임기 여성이 약 35년~40년 동안 매달 자기 몸에 일어나는 경험"이라며 "이를 개별적으로 처리할 문제라고 생각하면 안되는데 사회가 오랜 시간 그렇게 인식해왔다"고 짚었다.
* 이아리따, 박수정 기자가 공동 취재하고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