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봉동이 범죄도시?” 한숨 느는 주민들

2017-10-13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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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주인과 행인들도 대부분 조선족이나 한족으로 보이는 중국 사람들이었다.

지난 9월 10일 서울 대림역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연 중국 동포들 / 영화 청년경찰 상영금지 촉구 대림동 중국동포·지역민 공동대책위원회 제공
지난 9월 10일 서울 대림역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연 중국 동포들 / 영화 청년경찰 상영금지 촉구 대림동 중국동포·지역민 공동대책위원회 제공

지난 11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한 사무실에는 중국 동포 단체들을 주축으로 꾸려진 대책위원회 위원들이 모였다.

'청년경찰 상영금지 촉구 대림동 중국 동포·지역민 공동대책위원회'는 이 자리에서 영화 '범죄도시' 상영금지를 촉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중국 동포들을 혐오스러운 범죄집단으로 묘사했다는 게 이유다.

지난 3일 개봉한 영화 '범죄도시'는 2004년과 2007년 서울 가리봉동에서 일어난 '왕건이파'와 '흑사파'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중국에서 넘어온 조선족 조폭 장첸(윤계상 분) 일당을 잡기 위해 형사 마석도(마동석 분)가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담았다. 영화 속 조선족 조폭들은 경찰에게도 칼을 휘두르는 흉악범들로 등장한다.

12일 오전 영화 '범죄도시' 배경이 된 서울 구로구 가리봉 종합시장 인근에 들어서자 중국어 간판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가게 주인과 행인들도 대부분 조선족이나 한족으로 보이는 중국 사람들이었다.

말을 걸면 "한국말 잘 모른다"며 고개를 젓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거리는 휑해보일만큼 한산했다.

중국어 간판이 대부분인 가리봉 종합시장 인근 가게들 / 이하 위키트리
중국어 간판이 대부분인 가리봉 종합시장 인근 가게들 / 이하 위키트리

가리봉 시장 인근은 중국 동포 밀집 지역이다. 2000년대 초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빠져나가면서 값싼 주거지를 찾던 중국 동포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8~90개 인력사무소가 몰려있는 가리봉 인력시장에도 조선족, 한족들이 몰리면서 가까운 가리봉 시장 인근에 자연스레 주거지가 형성됐다.

지난 2016년 기준 서울 가리봉동에 거주하는 한국계 중국인(조선족)은 6560명을 넘어섰다. '한족'으로 불리는 중국인까지 포함하면 약 7400명에 이른다. 바로 옆 구로동, 영등포구 대림동과 함께 국내 최대 중국 동포 밀집 지역으로 꼽힌다.

가리봉 시장에서 채소 납품일을 하는 황 모(남·50) 씨는 "여기는 대부분이 다 중국인 동포들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 지역 주민들이나 몇몇 가게 주인들 빼고는 보기 힘들다"며 "중국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특별한 건 없다. 사는 모습은 다 똑같다"고 했다.

가리봉 시장 마트 직원 김태환(남·44) 씨는 "요즘 들어 손님들이 뚝 끊기긴 했다. 추석 대목에도 손님이 별로 없었다. 매출도 5분의 1 정도는 줄어든 것 같다"고 말했다.

시장 외곽에 있는 식당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인 12시가 지났지만, 거리는 여전히 한산했다. 식당 10곳 중 8~9곳은 텅텅 비어있었다.

가리봉동에서 훠궈 식당을 운영 중인 조선족 백찬길(남·57) 씨는 "영화 '청년경찰', '범죄도시'를 보고 나서 불쾌했다. 같은 한민족인데 중국 동포들을 무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점심시간에도 텅텅 비어있는 식당
점심시간에도 텅텅 비어있는 식당

백 씨는 최근 가게 매출도 계속 줄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국 손님들도 종종 있었는데 요즘엔 찾아보기 힘들다. 근처 가게들은 다 어려워서 직원을 줄이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

8년 전 가리봉동에 정착한 김용운(58) 중국 동포 자율방범대 대장은 "새벽 3시 가게 출근 무렵부터 시작해 수시로 순찰을 돈다. 전국 중국 동포 자율방범대가 있는 곳 중 가리봉동이 가장 안전하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10평(33㎡) 남짓 되는 자율방범대 사무실 한쪽 벽면은 각종 감사장과 인증서로 꽉 찼다. 지난 8월 경찰청장에게 받은 '2017년도 베스트 외국인 자율방범대' 인증서도 걸렸다.

가리봉 시장 입구 근방에 위치한 동포 자율방범대 사무실
가리봉 시장 입구 근방에 위치한 동포 자율방범대 사무실

김 대장은 "올 초까지만 해도 술집이나 노래방, 특히 양꼬치 식당 같은 곳에 한국 사람들이 꽤 많았다. 8~9월부터 수가 팍 줄더니 이제는 죄다 중국 사람들뿐이다"고 했다.

그는 "똑같은 가격, 메뉴인데 5분 거리에 있는 가산동 식당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팔짱을 낀 채 깊은 한숨을 내쉰 김 대장은 인적이 드문 길거리를 잠시 바라봤다. 그는 "식당 매출도 절반 넘게 줄었다. 정리하려고 임대로 내놨다"고 했다.

김 대장은 "친하게 지내는 한국인 친구들도 많은데, 놀러 오라고 하면 칼 맞을까 봐 무서워서 안 온다고 한다. 술 먹고 얻어맞을까 무섭다고들 한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범죄도시'같은 영화를 보고 누가 이 동네에 오고 싶겠냐"고도 덧붙였다.

인적이 드문 가리봉 시장 거리 모습
인적이 드문 가리봉 시장 거리 모습

실제 가리봉동의 범죄 발생률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7%가량 줄었다. 서울 구로경찰서 관계자는 "예전보다 거리도 깨끗해지고, 범죄율도 줄었다"고 전했다.

'중국 동포, 다문화,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한국 영화 바로 세우기 범국민대책위원회' 김용필 집행위원은 "가리봉동은 그 전부터 영화나 여러 미디어에 안 좋은 이미지로 많이 비쳐졌다. '범죄도시' 측에서 촬영 협조를 요청했지만 주민 반발로 무산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아무리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영화에는 과장된 부분들이 많다. 이런 영향으로 중국 동포 전체에 대한 편견이 생긴다는 게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이응철 교수는 "사실 한국에 있는 조선족을 비롯한 중국 동포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닌 고질적인 문제"라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중국 동포들의 시위는 영화를 계기로 일어난 것이긴 하지만, 그런 오래된 차별들이 누적된 결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해결 방안을 묻는 말에는 "조선족 문제뿐 아니라 대부분의 차별과 혐오 문제들의 기저에는 '나의 것을 다른 누군가가 갉아먹는다'는 의식이 깔려있다. 나와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그 틈을 메우려는 서로 간 노력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home 윤희정 기자 hjyun@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