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를 강타한 마블” 마블 번역가가 밝힌 '마블의 현재와 미래'
2018-06-12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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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번역가는 “마블은 원작 팬과 일반 대중 사이에서 밸런스를 맞추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마블 슈퍼히어로 영화는 영화사에서 새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지난 4월 개봉했던 '어벤져스:인피니티워'가 엄청난 흥행을 거뒀다. '데드풀2'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마블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이들이 영화 역사상 가장 성공한 프랜차이즈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국내 최고 마블 전문가를 만나 얘기를 듣고 싶었을 때, 바로 최원서 번역가를 떠올렸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15년 12월 마블 콘텐츠 강연회였다. 그는 "여러분도 매니아죠? 저도 그렇습니다. 덕후끼리 이야기해보죠"라고 시작했던 모습이 인상깊었다.
최원서 번역가는 2009년 국내 최초 정식 발간된 마블 코믹스 '하우스 오브 엠', '시크릿 워', '시빌워' 를 번역했다. 그외에도 '데어데블 본 어게인', '슈퍼맨 버스라이트'를 비롯해 지난 4월 '마블스'까지 20권이 넘는 코믹스를 번역 작업했다.
서울 사당역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최 번역가는 지난 4월 발매된 '마블스' 그래픽 노블을 손에 쥐고 있었다. "기자님도 팬이신거 같아 책을 가져 왔어요" 눈빛은 순수한 팬심으로 반짝거렸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마블 코믹스를 섭렵한 그에게 마블의 성공 요인과 인기 이유에 대해 자세히 물어봤다.

MCU는 원작 코믹스에 익숙치 않은 일반 대중을 어떻께 끌어 들였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가 영화에서 잘 구현하고 있는 것은 대중 입맛에 맞게 잘 변형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원작 팬들이 원하는 요소와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사이에서 적정한 밸런스를 맞추는 능력이 탁월하다.
MCU는 '이스터 에그'를 잘 활용하고 있다. '이스터 에그'는 게임에서 재미삼아 숨겨놓은 메시지를 말하는 용어다. 마블은 각 영화에 추후 큰 그림을 위한 단서를 조금씩 숨겨 놨다. 관객들은 각 영화마다 숨어있는 퍼즐을 모아 전체 그림을 완성하면서 희열을 느낀다. 차기 작품에 대한 기대감과 프랜차이즈에 대한 관객 충성심을 높이는 좋은 전략이다.

마블 스튜디오는 왜 '아이언맨'으로 시작했나?
MCU를 시작할 때 '아이언맨'으로 고른 건 잘 한 선택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영웅물'하면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 정도였다. 2005년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 개봉은 마블에게 본격적으로 자사 콘텐츠를 활용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관객들이 현실적인 히어로 영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아이언맨' 원작은 미국식 영웅물(히어로)과 일본식 기계만화(메카닉)가 잘 결합된 작품이다.

디자이너 아디 그라노프(Adi Granov)가 고안한 아이언맨 수트는 미국식 슈퍼히어로, 기계가 갖는 매력을 모두 만족시켰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Robert Downey Jr.) 캐스팅도 좋았다. 매력적이고 돈 많은 남자 주인공은 남녀노소 모두 좋아한다.
마블에서 MCU를 시작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어떤 히어로가 영화로 만들어지길 원하나?'는 설문조사를 했다. 조사에 응한 아이들은 액션 피규어로 익숙한 '아이언 맨'을 선택해 2008년 영화로 제작됐다.
'타노스'를 최종 보스로 선택한 이유는?
마블은 작품에 '쿠키 영상'과 '이스터 에그' 등 팬들이 찾을 수 있게 단서를 숨겨 놨다. 쿠키 영상과 이스터 에그를 통해 조금씩 공개하기에 가장 좋은 캐릭터가 '타노스'였다. 중간 보스를 먼저 선보이고 최종 보스를 내보이기에 내용상 좋았고 우주로 확대하는 MCU 세계관에도 맞았다.

타노스는 지면에서 60년대 후반 첫 등장했다. 90년대 '인피니티 건틀릿' 스토리 이후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당시 만화책을 보고 자라난 이들이 현재 마블 스튜디오의 핵심 제작진들이다. 그들에게 최종 상대로 타노스를 떠올린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할 것이다.
'그래픽 노블'이란?
'그래픽 노블'은 원래 있던 단어가 아니라 만들어진 단어다. 원래는 정기 간행물보다 더 두껍고 긴 내용과 단행본 성격 책을 지칭하던 용어다. 마블사는 80년대 초반 독자층을 성인까지 확대하는 목표를 세웠다.

기존에 사용되던 '코믹북(comcbook)'이 어감상 어린 연령대에서 쓰는 단어 같다고 느껴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서사구조를 강화하고 '소설'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당시 미국 성인 독자들도 만화를 '아이들의 전유물'로 여기고 구매를 꺼렸지만 명칭이 바뀐 후 판매량이 점점 상승했다.
코믹스도 영화처럼 진입장벽이 높나요?
그래픽 노블로 개편되면서 새로운 독자들이 봐도 이해할 수 있게 구성됐다. '어벤져스'같이 여러 영웅이 나오거나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로 구성된 책이 좋다.
접근성이 좋은 작품을 고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만화는 일본이나 우리나라와 달리 작가가 자주 바뀐다. 똑같은 내용이라도 구성과 그림체가 바뀌어 지루하지 않은 장점이 있다.

'마블'과 'DC'는 어떻게 변할까요?
지금 이대로 간다면 십 수년 후에는 스타워즈보다 강한 팬덤 층이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흥행의 발판이 된 원작을 보면 소재가 무궁무진하다.
마블 스튜디오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인물들을 잘 조합하고 있다. DC 코믹스와 달리 마블은 조연급 캐릭터라도 개성과 변별력이 뚜렷하고 좀 더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 큰 그림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가지치기를 잘하고 있다.

DC는 마블보다 역사도 오래됐고 코믹스 기준으로 판매 부수도 많다. DC의 캐릭터 수도 마블처럼 많지만 영화로 구성할 때 쓸 수 있는 소재가 한정적이다. 같은 캐릭터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다 보니 영화를 리부트할 때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마블 등장 전에 히어로 하면 많은 사람들이 '슈퍼맨', '배트맨'을 떠올렸다. 하지만 영화에서 사용할만한 새로운 캐릭터 개발이 마블보다 더디게 이뤄졌다. 마블은 팀으로 움직이는 유닛이 '어벤져스', '엑스맨', '판타스틱4' 등 다양하지만 DC의 경우 '저스티스 리그'를 제외하고 당장 작품에서 활용할만한 팀이 없다.

'마블 팬'에서 '번역가'가 된 계기가 있다면?
초등학교에 다니던 92년도에 처음 코믹스를 접했다. 풀컬러 64쪽으로 구성된 얇은 책들 수집해가며 열심히 읽었다. 미국 코믹스는 한 호 분량이 64쪽 정도다. 예전에는 모든 스토리가 단행본으로 나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어린 시절 만화책을 읽으며 미국 대중문화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한동안 학업과 일을 하다 보니 관심을 두지 못했다. 2007년 무렵 국내에 본격적인 출간을 알렸던 '왓치맨' 번역판을 접하고 다시 관심이 생겼다.
그는 같은 해 도서출판 시공사 의뢰로 코믹스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2009년 첫 코믹스 번역 작품 '시크릿 워'를 냈다. 이후 본업과 번역 작업을 함께 하면서 코믹스와 미국 대중문화 전반에 대해 글로 쓰는 작업도 하고 있다.

번역가가 본 번역은 어떤가요?
팬으로서 문화 콘텐츠 자체를 소비하는 것도 재미있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생각한다. 기존 창작물을 새로운 형태로 변형시켜 나만의 작품을 만드는 기쁨이 크다.
번역할 때 원작만화를 받거나 소스 파일을 보며 작업한다. 번역가마다 작업방식이 다르다. 나는 원작을 읽는 동시에 실시간으로 작업한다. 되도록 본래 뜻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보면 원제가 'Lost In Translation'이다. 번역된 제목은 영화 제목으로 임팩트 있게 직역하기 힘든 문구를 나름 잘 살려 의역했다.
의역 번역과 직역 번역은 장단점이 있다. 의역을 하게 되면 우리나라 관객이나 독자가 보기에는 자연스럽지만 원작 의도를 훼손할 수 있다. 영화 '데드풀'에서 '해시태그 드라이브 바이'라고 언급된 부분이 있다.
해당 단어는 갱단들이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총질을 하듯이 데드풀이 할머니 옆을 지나가면서 방귀세례를 한다는 뜻이다. 당시 작품에서 '방스타그램'으로 번역했는데 스쳐지나가는 영화 자막만으로 원래 의미를 살리는 번역을 하기 힘들어 창조적 번역을 했다고 생각한다.
만화 번역이 영화 번역보다 상대적으로 유연한 점은 주석을 달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문화에 관한 설명이나 용어의 유래 등을 적을 수 있다.

코믹스 관련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을 위한 조언이 있다면?
번역가가 되는 것에 진입장벽이 높다는 편견이 있다. 영어 실력과 한국어 문장력만 갖춘다면 생각보다 진입장벽이 높진 않다. 출판사에 요청을 하고 테스트를 통과하게 되면 작업물이 주어지는 형태다.
현재 마블 코믹스 한글판을 내는 시공사에서 번역가 5명이 활동 중이다. 이수현 번역가는 순수문학 소설가로 활동하기도 한다.
번역 작업을 하면서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화가들을 많이 알게 됐다. 예상보다 많은 한국 작가들이 마블·DC 등 코믹스에서 그림 작업을 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일본과 달리 분업화·시스템이 잘 구축돼 있다. 덧그림, 채색, 컴퓨터 그래픽 등 각 분야마다 다양한 작가를 뽑아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
같은 캐릭터도 단행본마다 작가가 바뀌기도 한다. 공장제 작업형태로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번역, 그림 작업 등 코믹스 관련 일과 기회가 많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