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출신 이대흠 시인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시집 내놔

2018-08-31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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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말은 향기로 시작되어 아주 작은 씨앗으로 사라진다”"은은하고도 가파른

 
“당신의 말은 향기로 시작되어 아주 작은 씨앗으로 사라진다”
"은은하고도 가파른 사랑, 애잔하고 아름다운 서정의 세계"

전라도 사투리의 질박한 언어와 흥겨운 가락이 어우러진 작품으로 남도 서정의 맥을 이어온 이대흠 시인이 긴 침묵 끝에 새 시집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을 내놓았다. ‘북에 백석이 있다면 남에는 이대흠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던 시집 '귀가 서럽다'(창비 2010) 이후 8년 만에 펴내는 다섯번째 시집이다. 오랜 시간 삭이고 갈무리해온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삶의 궁극적 원형, 자신이 나고 자란 곳에 대한 근원적 구심력, 사라져간 시간에 대한 애착과 긍정, 누군가를 향한 은은하고도 가파른 사랑 같은 것들이 선연하게 농울”(유성호, 해설)치는 애잔하고 아름다운 서정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삶의 비의(秘義)와 본질에 가 닿는 사유의 깊이와 원숙한 시선이 빛나는 평온하고 따듯한 시편들이 잔잔히 가슴속으로 스며들며 깊은 공감과 여운을 남긴다.

나무는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니다/나무는 흐른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더니/바닥에서 별이 돋아났다//나는 너무 함부로 아름답다는 말을 해왔다//…… 그래서 당신/나는,(「부춘」 전문)

시인은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나 서울, 광주, 제주도 등지로 떠돌다 이제 “서러운 것/바라는 것/생의 환희 같은 것이/다만 여백으로 기록되는”(「물의 경전」) 고향 땅에 다시 뿌리를 내렸다. 시인이 머무는 곳은 “처마에 새소리 걸리고/꽃향기는 경전처럼 고”이는 곳, “하늘을 들여 하늘과 놀고” “별자리 국자로/달빛을 나눠 먹”(「그 말에 들었다」)기도 하는 곳이다. 오랜 견딤과 위안과 평화의 시간이 흐르는 이 원형적 공간에서 시인은 ”동그란 무늬로 익어가는” 세월을 지켜보며 “꽃의 고통과 꽃의 숨결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가만 생각해”(「베릿내에서는 별들이 뿌리를 씻는다」)보기도 한다.

강으로 간 새들이/강을 물고 돌아오는 저물녘에 차를 마신다//막 돋아난 개밥바라기를 보며/별의 뒤편 그늘을 생각하는 동안//노을은 바위에 들고/바위는 노을을 새긴다//오랜만에 바위와/놀빛처럼 마주 앉은 그대와 나는 말이 없고//먼 데 갔다 온 새들이/어둠에 덧칠된다//참 멀리 갔구나 싶어도/거기 있고//참 멀리 왔구나 싶어도/여기 있다(「천관(天冠)」 전문)

자신의 존재론적 기원을 상상하고 더듬어가는 시인은 고향의 삶이야말로 두고두고 되새겨야 할 가치라고 믿는다. “겨울이 가장 오래 머무는 저 큰 산”(「큰 산」)처럼 다가오는 궁극적 원형으로서의 그곳은 “옹구쟁이라 하먼 설익은 잿물은 안 쓰는 벱”이고 “얼렁뚱땅 만든 잿물은 겉만 빤지르한 것”(「칠량에서 만난 옹구쟁이」)이라는 세상 이치가 엄연하고, “물건값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쓸 사람이 정하는 것이라는/월평 할머니의 경제학이 통하는 곳”(「천원집」)이다. 시인은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다시 읽고 싶은 시절”(「동백정 아침」)을 불러들여 호남 방언의 질감을 고스란히 살려내면서 “가뭄 끝 오그라든 물외 쓴맛 같은 이야기”(「강진」)를 살갑게 들려준다. 

장흥에서 조금 살다보면 누구든지/장흥 사람들이 장흥을/자응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하지만 자응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장흥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장흥 사는 사람과/자응 사람은 다르다//자응 장에 가서/칠거리 본전통이나 지전머리를/바지 자락으로 쓸어본 사람이라야 겨우/물짠 자응 사람이 된다//(…)//장흥에서 자응으로 가는 데는/십년이 족히 걸리고/자응에서 또 자앙, 장으로 가는 데는/다시 몇십년이 걸린다(「장흥」 부분) 

경이롭게 소멸해가는 시간 속에서 삶의 이면을 두루 투시해온 시인은 한편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새삼 떠올려 이제는 “보이지 않아서 더 분명해진 당신의 얼굴”(「삼우(三虞)」)을 그리며 가슴에 사무치는 회억에 젖는다. “무논의 논둑 한번 제대로 밟아보지 못”하고 “구름처럼 살다가 평생 동안/구름 하나 잡지 못한”(「구름 사냥꾼 1」) 아버지, “틈만 나면 구들을 지고 집을 지”키다가 “그 무거운 짐을 끝까지 부려놓지 않고 종갓집을 평생 지다 선산을 짊어지러 무덤에 누”(「아버지의 벼 베기」)운 아버지. 그러나 “그 말씀이 별빛으로 남”(「구름 사냥꾼 4」)은 아버지. 어쩐지 뒷전으로 물러나 삶의 뒤안길에만 계셨을 법한 아버지에 대한 생생한 기억들이 가슴을 울린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평생 흘려 모아 말린 별씨를 들고/어느날 훌쩍 하늘밭으로 가버리셨다//서쪽 하늘에 움 돋는 눈물별//구석에 버려진 조각 비누 같던 한생이/문득 아주 버려진 날(「눈물별」 전문)

시인은 “누군가를 오래 그리다보면 문득 그의 얼굴이 얼룩 속에서 살아난다”(「얼룩의 얼굴」)는 것을 안다.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 “애써 지우려 하면 오히려 음각으로 새겨지는 그 이름”(「목련」)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아니라면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런데 “사랑을 할 줄만 알아서/무엇이든 다 주고/자신마저 남기지 않”(「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은 채 사라져간 ‘당신’은 시인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이이기도 하고, 어쩌면 시인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그대가/그대로 있는 것만이 사랑”(「북천의 봄」)이고, “꽃의 말과 새의 말과 사람의 말이/구분되지 않는”(「북천의 물」) 곳, 삶의 근원적 성소(聖所) ‘북천’에서 시인은 “얼고 녹고 부서지고 타버려도/사라지지 않을” 웅숭깊은 “사랑의 말”(「북천에서 쓴 편지」)을 노래한다. 

달이 빛나서 북천이 밝습니다/북천이 밝아서 당신이 보입니다/나를 보고 웃는 낯빛이 고요합니다//단 하나의 사랑을 지어 달로 띄워 올립니다(「북천의 달빛」 전문)

이대흠 시인

어느덧 지천명의 나이에 등단 25년을 맞은 시인은 “먼지 하나에도 한 우주가 들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너무 꽉 끼고 구겨진 우울을 입은 저물 무렵」)을 간직하는 사람이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는 “말이 지닌 본디의 것을 살리는 데 애를 썼다”(시인의 말)고 한다. “시적․인간적 국량(局量)을 극점까지 끌어올린”(유성호, 해설) 이번 시집이 일궈낸 시적 성취는 실로 풍성하다. 그러므로 “뿌리가 살아 있는 시를 쓰기 위해 치열했을 시인의 모습이 뭉클 겹쳐”지는 “이 시집의 탄생을 오래 축하하게 되리라”(함민복, 추천사)는 말이 비단 입에 발린 인사치레만은 아닐 것이다. 

눈이 먼 것이 아니라/눈이 가려 봅니다//귀가 먼 것이 아니라/귀도 제 생각이 있어서/제가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다 내 것이라 여겼던 손발인데/손은 손대로 하고 싶은 것 하게 하고/발도 제 뜻대로 하라고 그냥 둡니다//내 맘대로 이리저리 부리면/말을 듣지 않습니다//눈이 보여준 것만 보고/귀가 들려준 것만 듣고 삽니다//다만 꽃이 지는 소리를/눈으로 듣습니다//눈으로 듣고 귀로 보고/손으로는 마음을 만집니다//발은 또 천리 밖을 다녀와/걸음이 무겁습니다(「늙음에게」 전문)

(창비시선 425)창비 / 2018년 8월 31일 발행 / 장46, 120면 / 값 8,000원 / ISBN 978-89-364-2425-1  03810

             

home 노해섭 기자 nogary@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