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게임, 중국의 판호 발급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2020-08-0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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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업계, 중국 게임은 국내 시장 활보하나 한국은 판호 발급 중단
인내심 갖고 절치부심 필요해… 과거 IP 재탕보다 역량 더욱 길러야

‘가랑이 밑을 기는 치욕’을 뜻하는 과하지욕(袴下之辱)의 유래는 이렇다. 어느 날 칼을 차고 다니는 한 남성에게 불량배는 “칼을 차고 있지만 넌 겁쟁이”라며 시비를 걸었다. 불량배는 “나를 공격하지 못하겠다면, 내 가랑이 아래로 기어라”고 말했다. 남성은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 지나갔다. 굴욕을 면치 못한 이 남성은 훗날 한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이 된다. 인내(忍耐) 끝에 대업을 이룬 한나라 초왕 한신 얘기다.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판호를 주제로 토론의 장이 열렸다. 판호는 중국에 게임을 서비스하기 위한 유통 허가권이다. 한국 게임은 2017년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이후 중국 내 판호 발급이 전면 중단됐다. 이와 관련해 유수의 게임 업계 관계자들이 토론에 참석하면서 저마다 의견을 내비쳤다. ‘중국은 전 세계 최고의 게임 시장’ ‘판호 발급은 필수’ 등 천편일률적 토론일 것이라는 예상을 빗맞혔다.
외교 문제에 정통한 우수근 중국 화동사범대학 특별초빙교수는 “판호는 철저히 정치적인 문제”라며 “설사 판호가 발급돼도 예전만 못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윤선학 중원게임즈 대표는 “과거 국내 게임을 구매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켰던 중국 게임사의 개발력은 이제 상당한 수준”이라며 “판호 발급이 국내 게임의 성공을 보장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황성익 한국모바일게임협회 회장은 “훌륭한 지식재산권(IP)을 만들고, 이를 발판으로 중국 시장 진출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상현 한국콘텐츠진흥원 북경센터장은 “중국 시장은 퍼블리셔 중심이다. 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게임을 수입하고 싶어 한다”며 “국내 게임 회사들은 강점 있는 분야를 파고들어 역량을 축적해야 한다”고 했다.
종합해보면 ▲판호 문제는 정치·외교 문제와 연계된 중차대한 사안 ▲현재는 중국 진출에 목매기보다 국내 게임들의 경쟁력을 갖추고 개발 역량을 강화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다만, 대척점에 선 이들은 판호 발급은 필수라고 말한다. 아울러 “중국 게임은 국내 시장 진출이 자유로운 반면, 한국은 중국에서 전혀 실적을 내지 못한다”는 ‘불공정 시장 경쟁’ 논리를 전면에 내세운다.

국내 게임 업계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시 주석이 판호 문제 해결의 신호탄을 쏴주길 학수고대한다. 이 과정에서 ‘중국에 질질 끌려다닌다’는 비난 섞인 목소리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중국은 되고, 한국은 안 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목청을 높인다. 중국의 가랑이 아래를 기고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한국 게임이 판호 발급을 기다리고 있고, 그 사이 ‘AFK 아레나’ ‘라이즈 오브 킹덤즈’ 등 중국 게임은 국내 시장에서 위용을 떨치고 있다. ‘그랑삼국’도 최근 무섭게 치고 올라온다. 당장은 가랑이를 기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신처럼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과하지욕은 한신을 옥죄기도 했지만, 이후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기 위해 한신은 더욱 절치부심했다. 훗날 한신은 불량배를 다시 불러 “고맙다. 그날의 굴욕을 참아 지금의 내가 있다”고 말하면서 벼슬을 내렸다.
국내 게임 업계도 한신처럼 인내심을 갖고 절치부심해야 한다. 넥슨의 ‘바람의 나라’ ‘카트라이더’도 좋고, 엔씨소프트의 ‘리니지’도 좋다. 넷마블의 ‘마구마구’도 맞는다. 그러나 과거 IP의 재탕보다는 “판호가 발급되어도, 중국은 좋은 평가를 받는 게임에 ‘러브콜’을 보낼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공통된 주장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신처럼 “고맙다”고 말할 수 있다.
인내심, 다음으로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 어쩌면 판호 발급보다 더 시급한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