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500만원'만 들고 1970년대로 간다면 어디에 투자하겠습니까
2021-09-17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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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버스터미널·명문고 이전으로 뜬 강남
반포주공 분양가 500만원, 지금은 26억원


단돈 500만원을 들고 1970년대에 간다면 어디에 투자하겠는가. 강남 땅? 강남 아파트? 삼성전자 주식?
박정희 정권이 '남서울 개발'이란 미명으로 밀어붙인 국내 최초의 신도시 개발로 강남은 대한민국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공간이 됐다. 부동산 정보업체 직방 등의 도움말로 강남 변천사를 짚어보자.
편리한 교통시설, 사통팔달의 입지, 우수한 학군과 풍부한 일자리. 이걸 다 갖춘 지역을 서울에서 딱 한군데만 꼽으라면 강남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만 해도 강남은 허허벌판이었다. 잠원동에서 무 농사해 강북 유명 짜장면집에 단무지를 공급했다고 전해진다. 그때까지만 해도 "강남 그런데 누가 살아" 이런 분위기였다고 한다.
1960년대 초 강남은 행정구역상 경기도에 속해 있었다. 서울하면 한강 이북만 쳐줬다. 흔히 말하는 사대문 안만 서울이었다.
강남이라는 말 자체가 한강 이남을 통틀어 일컫는 것인데, 당시만 해도 지금의 강남권(강남·서초·송파)은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의미로 영동으로 주로 사용됐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서울 인구가 폭증하면서 거주지가 부족하게 되자 강남은 1969년 1월 성동구에 편입되며 서울에 포함된다.
당시 강남땅 1평이 400원이었다고 한다. 그때 짜장면 1그릇이 15원이었으니, 짜장면 27그릇 값이면 강남땅 1평을 살 수 있었다. 물가가 다르니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현재 짜장면 가격이 7000원 정도이니, 19만원이 안되는 돈으로 강남땅 1평을 쥘 수 있다는 것과 같다.

강남 벌판에 처음으로 들어선 아파트는 논현동 영동공무원아파트였다. 1971년 4월 착공해 그해 12월 초스피드로 완공했다. 5층 아파트 12개동에 360세대 규모였다.
서울시가 무주택자 공무원들에게 분양했는데 12평, 15평 두 평형이 있었다. 방 하나에 5~6식구가 모여 살던 시절, 15평형은 초대형 아파트라는 반응이 나왔다.
분양가도 낮아 입주 수요도 많았다 그런데도 입주민들이 머지않아 강북으로 줄 컴백했다.
주변에 인프라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장, 학교, 병원도 없으니 두손 두발 다 들고 나갔다고 전해진다.

실제 강남은 사람 살 데가 못 된다고 여겨지던 곳이었다. 지대가 낮아 홍수가 났다 하면 상습 침수 구역이 됐다. 단적으로 '남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까지 회자했다.
이 실패 케이스를 보고 서울시와 정부는 이런 방식으로는 강북 밀집 인구를 분산할 수 없겠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가 1972년 내놓은 카드가 영동지구 주택건립계획이었다.
지금의 압구정, 학동, 청담동, 논현동 일대에 대규모 아파트 개발 계획을 세웠다. 본격적인 강남 원주민이 등장할 토대가 마련됐다.
그럼에도 인프라 부족으로 수요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강북 주민들의 강남 이사를 결심하게 만든 소식은 아이러니하게도 해외에서 날아왔다.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의 함락 뉴스가 전해진 것.
휴전선으로부터 강북 도심까지는 대략 40km가량이었다. 흉흉한 남북 대치 상황에서 강남이 더 안전하다는 인식이 퍼졌다.
여기서 드는 합리적인 의문 하나가 있다. 강남 대규모 개발 계획을 진행하는 돈은 어디서 났을까.
박연미 경제평론가에 따르면 없던 땅을 조성해 아파트를 지었기에 남는 수익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압구정 현대아파트 자리가 원래는 한강이었다. 거기에 물을 메우고 땅파기를 해서 아파트를 올렸다는 것.
없는 땅을 만들고 정부가 팍팍 대출해주는 돈을 받아 아파트를 짓고 또 이것을 후분양으로 팔았으니 현대건설로서는 앉아서 떼돈 버는 사업이었다는 설명이다.
점점 서울 유입 인구가 늘어나면서 1975년이 되면 성동구, 영등포구에서 떨어져 나간 지금의 강남구가 탄생하게 된다.

기세를 몰아 건설부(지금의 국토교통부)는 1976년 11개 아파트 지구를 지정한다. 아파트 지구로 고시되면 해당 지역에는 아파트와 부속 상가만 지을수 있었다. 11개 아파트 지구 중 6개가 강남에 있었다. 사실상 강남 아파트 단지 조성 프로젝트였다.
그렇다면 강남은 언제부터 이렇게 핫했을까. 사대문 사람들은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던 강남을 지금의 서울 중심으로 만든 이유가 뭘까.

우선은 강북에 난립해 있던 고속버스정류장들을 하나로 모아 1976년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을 조성한 것이었다.
유흥업소의 강남 이전도 빼놓을 수 없다. 1970년대 강북 도심에 있던 유흥업소들은 신규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대신 경부고속도로를 만들려고 했던 부지 일부를 유흥업소 희망자들에게 매각한다. 70, 80년대 신사동을 중심으로 압구정동 일대까지 유흥업소가 확산하게 된다.
명문고의 강남 이전은 강남 발전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
70년대 초 서울의 명문 공립고는 경기, 서울, 경복, 용산, 경동고 등이었다. 사립고는 양정. 배재, 휘문, 보성, 중앙고 정도였다. 죄다 강북 그것도 청와대 인근에 몰려 있었다.
4·19혁명과 6·3학생운동의 여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시대적 배경, 같은 시위가 되풀이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독재정권의 복합적인 불안감이 명문고를 강남으로 떠민 배경이 된다.
비슷한 시기 서울시는 교육의 평등성 실현이라는 이념 아래 고교평균화 정책을 도입한다.
1974년부터 서울을 5개 학군으로 묶어 동일 학군에 있는 중학교 졸업생은 동일 학군의 고등학교만 갈 수 있다는 내용이다.
1987년이 되면 서울의 인구가 팽창해 학군이 종전의 5개에서 9개로 늘어난다. 강북의 명문고가 대거 이전한 강남구+서초구 두 구의 학군이 바로 8번째 학군이 돼 그 유명한 8학군의 시대가 열린다.
오로지 도심 인구 분산을 목적으로 했던 고교 이전은 평준화 정책을 만나면서 '교육특구 탄생'이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거센 반발 끝에 밀어붙인 명문고의 강남 이전이 현재 강남 아파트 값을 떠받치는 가장 강력한 부력이 됐다.

처음 했던 얘기로 돌아가서 1974년 서울 서초동 반포주공아파트 분양가는 500만원이었다.
지금은 얼마일까. 재건축이 진행 중이라 향후 가격이 더 오를 건데 지난 6월 실거래가 기준으로 26억원이다. 무려 520배가 뛰었다.
1975년에 한국증권거래소(한국거래소의 전신)에 첫 상장된 삼성전자 주식을 500만원어치 샀다면 지금쯤 평가액이 얼마가 될까. 또 같은 금액으로 강남땅을 구입했다면 지금쯤 시세가 얼마나 나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