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그와트 같은 기숙사에 화려한 드레스… '설강화' 속 여대는 왜 그럴까 [위키의 눈]
2021-12-23 18:54
add remove print link
'설강화'의 배경 호수여대
모티프 된 실제 이화여대는 1980년대에 어땠을까
배우들은 한입으로 소품과 의상을 통한 '시대적 고증'을 이야기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정말 고증이 잘 된 건지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JTBC 토일드라마 '설강화' 이야기다.

최근 방송되고 있는 '설강화'의 배경은 호수여대다. 호수여대의 밑그림이 된 건 이화여자대학교(이하 이화여대)라고 봐도 무방한데, '설강화'의 제작 단계 가제가 '이대기숙사'였기 때문이다. 대본을 쓴 유현미 작가가 실제 이화여대 출신이다.
'설강화'는 사실 시놉시스 단계에서부터 민주화 운동을 폄훼할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니냐며 많은 드라마 팬들의 우려를 샀던 작품. 이 때문인지 '이대기숙사'라는 이름은 '설강화'로 변경됐고, '이수여대'로 설정됐던 대학교의 이름도 '호수여대'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해방호수'와 같은 구호가 '해방이화'(이화여대의 FM 자기소개에 사용되는 구호)와 겹쳐 '설강화' 속 호수여대와 실제 이화여대를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민주화 항쟁이 전국적으로 한창이던 1987년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실제 그 시대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였던 대학교를 모티프로 배경을 설정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설강화' 속 호수여대는 묘하게 당시의 이화여대와 거리가 있어 시청자들로 하여금 의문을 갖게 한다.

호수여대 기숙사의 이모저모와 인물 소개가 중심이 됐던 '설강화'의 1회 방영 이후 각종 온라인 사이트에는 호수여대 기숙사가 풍기는 분위기에 대한 지적이 올라왔다. 시대 고증이 잘됐다던 1987년도 대학교 풍경이 마치 판타지 영화 '해리포터' 속 마법사 기숙사인 호그와트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발랄하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배경음악 역시 이 같은 분위기를 배가시키는 데 한몫했다.


패션 역시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출연진은 1980년대 패션하면 흔히 떠올리는 넉넉한 맨투맨과 항공점퍼, 발목으로 오면서 점점 폭이 좁아지는 디스코 팬츠 대신 물방울무늬 등이 수놓인 원피스와 화려한 장신구들로 장식하고 있었다. tvN 종영극 '응답하라 1988'이나 영화 '써니' 등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다른 작품들과 이미지가 완전히 다른 '설강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마치 개화기 신여성 같다.
여기에 쥐가 나왔다는 말 한마디에 모두가 혼비백산해 도망가고, 공부하다가도 천장에서 삐그덕 소리가 조금 들린다는 이유로 소리를 '꺅 꺅' 지르며 달아나는 호수여대 학생들은 강제 연행과 고문 등으로 민주화 운동이 탄압되는 속에서도 꿋꿋하게 투쟁하고 옳은 것에 목소리를 내던 1980년대 강인한 여자 대학생들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198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여성해방운동이 진행되던 시기다. 국내에서도 1970년대 이후 '일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편안한 스타일의 옷이 사랑 받았다. 특히 서울올림픽 개최와 함께 각종 프로 스포츠 구단이 창단한 1980년대는 스포츠웨어에 대한 사랑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여성성과 남성성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어깨에 소위 말하는 '뽕'이 잔뜩 들어간 '파워 슈트'가 성별을 불문하고 사랑 받았다. 특히 1987년과 같이 수많은 대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을 위한 투쟁을 벌인 시기에 기숙사에서 지내는 여자 대학생 대부분이 잠옷까지 퍼프 소매와 레이스로 된 것을 입고 지냈다는 설정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대학보를 보면 당시의 이화여대 풍경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총학생회는 물론 만 여 명의 일반 학생들이 모였던 1987년 6월 항쟁 때의 이화여대. 수많은 학생들이 대강당과 계단을 가득 채웠을 정도라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1987년뿐 아니다. 이화여대에서는 전두환이 집권한 1980년 이후 매년 5월이 되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강제로 진압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 집회가 열렸다고 한다. 민주화 열기가 한창이던 1987년을 배경으로 한 '설강화'에서 호수여대 주요 캐릭터 중 1명만 운동권 학생으로 설정된 것과 사뭇 비교되는 교정 풍경이다.

물론 드라마가 시대의 모든 것을 그 때와 똑같이 구현할 수는 없다. 제작비나 여건의 한계라는 것이 존재하니까. 하지만 '민주화 항쟁'이라는 키워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1987년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여자 대학교의 풍경을 아름답고 화려하게만 그리는 것을 '고증이 잘됐다'고 표현하기는 힘들다.
'설강화' 연출자인 조현탁 PD는 1회에 앞서 홍보대행사를 통해 공개한 관전 포인트에서 "의상과 분장을 포함해서 세트 및 소품 등 이 작품에서 미술은 전면에 나서 있는 또 한 명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촬영 6개월 전부터 미술감독님과 매주 회의를 하면서 아주 꼼꼼히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설강화'에서 보이는 이미지들이 제작진의 큰 그림 아래 철저히 준비됐다는 의미다.
1980년대는 대충 '레트로'라는 키워드로 앞선 시대들과 묶일 수 있는 먼 과거가 아니다. 그 때 청춘을 보낸 이들이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중역이 돼 일하고 있다. 조 PD는 "당시의 패션과 헤어 메이크업, 세트와 소품이 우리 모두를 어느 기억 속으로 데려가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며 기대감을 보였다. 그러나 시청자들이 '설강화'를 보고 최루탄 연기로 숨쉬기 어려웠던 1987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났을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