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뜨겁거나, 들끓거나...” 태국전 현장, 극명하게 갈린 '온도차'

2024-03-22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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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대표팀, 최악의 혼란 속 치러진 A매치

(서울월드컵경기장 = 김희은 기자) “64912” 지난 21일 태국전을 응원하기 위해 찾은 관중들의 공식 집계 수다. 앞서 불거진 ‘보이콧’ 여론과 달리 현장은 붉은 물결로 가득했다. 여전히 대표팀 선수들을 향한 축구 팬심은 뜨거웠다.

이날 오후 8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는 2024년 한국 축구 대표팀의 첫 국내 A매치인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태국과의 경기가 열렸다. 앞서 6만 석 티켓 전석 매진 소식이 들렸던 터라 예상은 했지만, 현장은 축구팬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열기는 축제를 방불케 했다. 앞서 보이콧 움직임이 일었던 것과는 상반된 분위기여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퇴근 후, 남편과 함께 서둘러서 경기장을 찾았다는 홍 모 씨(58)는 “월드컵이라는 큰 목표를 앞에 두고 팀 코리아에 걸맞은 멋진 경기를 기대하고 왔다”며 “하극상 논란 등 지난 일은 잊고 오늘만큼은 완전한 팀워크로 꼭 승리하길 바라는 마음이다”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지난 21일 대한민국 대 태국전이 열린 서울 월드컵경기장. 대표팀 선수들의 유니폼을 입은 팬들의 모습이 보인다 / 위키트리
지난 21일 대한민국 대 태국전이 열린 서울 월드컵경기장. 대표팀 선수들의 유니폼을 입은 팬들의 모습이 보인다 / 위키트리
경기장 입구에 걸린 대표팀 사진 / 위키트리
경기장 입구에 걸린 대표팀 사진 / 위키트리
이강인 응원 플랜 카드를 든 여성 팬 / 위키트리
이강인 응원 플랜 카드를 든 여성 팬 / 위키트리

경기 시작 두 시간 전부터 축구 팬들의 발길이 시작됐다. 머리에는 붉은 악마 머리 띠를, 한 손에는 응원봉과 플랜 카드를 든 채 저마다 특정 선수들을 응원했다.

압도적 인기는 역시나 주장 손흥민이었다. 토트넘 유니폼을 입은 축구 팬들이 눈길이 닿는 곳마다 있었다. 또 전날 대국민 사과문 여파였을까. ‘하극상 논란’ 이강인을 향한 팬심도 곳곳에서 포착됐다. 이강인의 대표팀복은 물론 PSG(파리 생제르맹) 유니폼을 입은 이들도 수두룩했다. 이들은 엄지 척을 세운 채 자랑스럽게 기념사진을 찍었다. 응원 플랜 카드도 놀라울 만큼 많았다. 그중에서도 중학생쯤 돼 보이는 여학생이 전광판에 떴는데, ‘강인아 행복만 해’라고 적힌 플랜 카드에 한동안 시선이 머물렀다.

관중석이 붉은 물결로 가득 찼을 무렵, 태국부터 차례로 선발 명단이 공개됐다. 한국은 손흥민, 김민재, 설영우, 황인범, 백승호 등 선수들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다만 기대와 달리 이강인이 호명되지 않자 곳곳에서 “이강인은 왜 안 나오냐” 등 아쉬운 소리가 새어 나오기도 했다. 교체 명단에 포함된 이강인이 호명되자 팬들은 기다렸다는 듯 큰 환호로 화답했다.

이날 눈에 띈 건, 현장의 온도차였다. 대표팀 서포터즈 붉은악마는 ‘그냥 대가리 박고 뛰어. 응원은 우리가 할 테니'라는 걸개를 내걸고 선수들에 힘을 실었다. 동시에 축구 협회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에도 힘을 줬다.

현장을 메운 선수들을 향한 응원의 목소리 / 위키트리
현장을 메운 선수들을 향한 응원의 목소리 / 위키트리
축구 협회를 향한 들끓는 비난 / 위키트리
축구 협회를 향한 들끓는 비난 / 위키트리

경기가 시작되면 대표팀을 목이 터져라 응원했고, 경기가 멈추면 축구 협회를 향한 책임 여론이 매섭게 들끓었다. 응원석에는 '무책임한 협회를 규탄한다', 'KFA는 정몽규의 소유물이 아니다', ‘정몽규 사퇴하라’ 등이 적힌 걸개가 속속 등장했다. 붉은 악마를 필두로 관중들은 여러 차례 “정몽규 나가!”, "정몽규 나가!"를 연달아 외쳤다. 경기장은 이렇듯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

사실 경기력만 두고 보면 지독하게 안 풀리는 경기였다. 홈경기임에도 불구하고 패스 미스와 볼을 빼앗기는 상황이 잦으며 공격과 수비 모두 불안한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대표팀을 향한 변함없는 팬심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이들은 선수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전반 설영우의 어깨 탈구 부상에는 걱정이, 조현우의 선방에는 안도의 한숨이, 손흥민의 천금 같은 선제골엔 환호가 터져 나왔다. 선수들이 아쉽게 선방할 기회를 놓쳤을 땐 선수 이름을 세 번씩 연호하며 기를 살렸다. ‘엄지 척’은 물론, ‘화이팅’, ‘잘했다’ 등 칭찬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이 선수들과 함께 경기장을 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후반에는 불화의 중심에 섰던 손흥민과 이강인이 그라운드에서 함께 뛰는 장면도 연출됐다. 후반 초 수비가 흔들리다가 결국 태국에 동점 골을 허용하자 황선홍 감독은 정우영을 빼고 이강인을 교체 투입했다. 이른바 ‘사죄골’을 터뜨릴 발판을 마련해 줬다. 실제 이강인이 경기장에 등장하자 역대급으로 우레와 같은 함성이 구장을 가득 메웠다. 귀를 의심할 만한 순간이었다.

응원에 힘입어 이강인은 손흥민과 여러 차례 합작 골을 시도했다. 그러나 오프사이드 판정으로 골이 취소되거나 골대를 빗나갔고, 관중들은 짙은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이강인과 손흥민이 서로 패스하며 호흡하는 장면이 연출될 때마다 현장엔 격려의 박수가 쏟아졌다.

비록 승리하진 못했지만 선수들은 ‘원팀’으로, 또 관중들은 ‘하나 된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다.

경기 내내 목이 쉬어라 응원했다는 임 모 씨(28)는 “1:1로 비겨서 좀 아쉽긴 하지만 대표팀 선수들이 똘똘 뭉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경기 후반 이강인과 손흥민의 합이 돋보였다"며 "이강인 선수가 최근 여러 논란이 있긴 했지만 대표팀에 꼭 필요한 선수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는 말로 이강인을 향한 믿음과 자부심을 내비쳤다.

경기가 끝나고 포옹하는 주장 손흥민, 그리고 이강인 / 연합뉴스
경기가 끝나고 포옹하는 주장 손흥민, 그리고 이강인 / 연합뉴스

오늘부로 대표팀은 식지 않은 팬심을 확인했으니 앞선 불화는 잊고 이제 축구에 전념할 때다. 그리고 여론은 손흥민의 아픈 손가락이 아닌 선수들의 발끝에 시선이 향해야 할 때이다. 덧붙여 앞서 ‘행복만 해’라는 문구가 이강인뿐 아니라 땀흘린 모든 대표팀 선수들의 마음에 가닿았길 바란다.

home 김희은 기자 1127khe@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