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소년'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7-04-20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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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1년 3월 27일 '개구리 소년' 실종 장소인 대구 와룡산 일대를 수색 중인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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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 27일 '개구리 소년' 실종 장소인 대구 와룡산 일대를 수색 중인 경찰 / 이하 연합뉴스

1991년 3월 26일 오전 8시쯤, 대구 달서구 성서초등학교에 다니던 우철원(당시 13세), 조호연(12), 김영규(11), 박찬인(10), 김종식(9) 군은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길을 나섰다.

이날은 30년 만에 지방선거가 부활해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날이었다. 아이들은 달서구 이곡동에 있는 '와룡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높이가 낮고(299.7m), 야생동물이 많아 또래 사이에서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산 안에는 군부대와 사격장도 있어 탄피를 주우러 가는 애들이 꽤 있었다.

대구지방경찰청이 1995년 개구리 소년들의 성장한 모습을 컴퓨터로 추정해 배포한 전단지

같은 날 오후, 종일 흐리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쏟아졌다. 산에 갔다 오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은 이날 밤 11시부터 부모, 주민, 군인들과 함께 와룡산 일대를 수색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수색은 5년간 이어졌다. 군경 30만 8000여 명이 투입되고, 300회가 넘는 와룡산 수색이 이뤄졌다. 하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마치 땅으로 꺼지고, 하늘로 솟은 듯했다.

정확히 실종 11년 6개월째 되던 2002년 9월 26일.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 동쪽 세방골을 찾은 등산객 2명 눈에 수상한 뼈가 포착됐다. 그토록 찾았던 아이들 유골이었다. 발견된 두개골엔 뭔가에 맞아서 생긴 듯한 흔적이 뚜렷했다. 부검을 맡은 경북대 법의학팀은 "타살로 보인다"는 분석 결과를 내놨다. 실종사건은 그렇게 살인사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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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오전 대구 달서구 세방골에서 열린 '개구리소년 26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천도제를 유가족들과 시민단체 / 뉴스1

2017년 3월 26일, 대구 와룡산 세방골. 이날 오전 세방골에는 조촐한 제사상이 차려졌다. 연기처럼 사라져 유골로 돌아온 '개구리 소년' 26주기 추도식이 열린 날이었다.

'도롱뇽 알'을 주우러 나갔지만, 보도 과정에서의 혼선으로 '개구리 소년'이라 알려진 아이들은 26년 전 앳된 모습 그대로 영정사진 속에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남성이 영정 앞에 서 눈시울을 붉혔다. 실종된 우철원 군 아버지 우종우(70) 씨다. 우 씨는 "누구한테, 왜, 어떻게 무슨 이유로 아이들이 이렇게 당해야만 했는지 너무 궁금하다"고 말했다.

박찬인 군 아버지 박건서(65) 씨도 이날 세방골을 찾았다. 무릎이 좋지 않아 산 아래에서 추도식을 지켜봤다. 박 씨는 "이제 뭐 세월이 지나고 나니 바라는 것도 없다"며 "누구 말마따나 어떻게 죽었는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다"고 말했다.

'개구리 소년' 사건이 올해로 26주기를 맞았다. 유골이 발견된 지는 15년 째다. 이제는 범인을 잡아도 법의 심판을 받을 수가 없다. 2006년 공소시효가 끝났기 때문이다. 공소시효보다 더 무서운 '대중의 관심'도 사실상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범인이 잡히기 전까진 사건이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시민단체 '전국미아·실종 가족찾기 시민의 모임(이하 전미찾모)' 나주봉(59) 회장이다.

시민단체 '전국미아·실종 가족찾기 시민의 모임' 나주봉(59) 회장 / 이하 양원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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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회장은 1991년 인천 월미도에서 우연히 '개구리 소년' 유족들을 만났다. 당시 그는 각설이 공연을 하며 전국을 유랑 중이었다. 공연장 건너편에서 유족들이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아이들 얼굴이 담긴 실종자 찾기 전단이었다.

나 회장은 유족에게 전단지 500여부를 받았다. 과거 동생을 잃어버렸다 찾은 적 있는 나 회장은 '개구리 소년' 사건이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약 2년 반 동안 '개구리 소년' 유족들과 전국을 돌며 전단지를 나눠줬다. 어느새 유족, 경찰만큼 '개구리 소년' 전문가가 돼 있었다. 실제로 나 회장은 몇 년 전부터 강단에 서고 있다. 경찰대 경감·경정반에서 실종자 찾기 관련 강의를 맡고 있다.

"난 미친 사람이에요"

지난 13일 서울 동대문구 홍릉로에 있는 전미찾모 사무실에서 만난 나 회장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20년 넘게 한 사건에 매달리고 있는 자신을 자조하는 듯했다.

나 회장에게 '개구리 소년'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이다. 나 회장은 "'개구리 소년' 사건 관련 언론 보도를 녹화해 전부 갖고 있다"며 "요즘도 가끔씩 돌려본다. 목격자들의 생생한 목격담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개구리 소년' 사건 자료를 다시 훑어보고 있는 나 회장 모습

2006년 공소 시효 만료와 함께 경찰의 공식 수사가 종료된 뒤에도 나 회장은 10년 넘게 '개구리 소년' 범인을 쫓고 있다. 최근까지도 사건 관련 자료를 입수해 용의자를 추정 중이다. 나 회장은 '개구리 소년' 사건이 우발적 범죄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1991년 3월 26일은 전국 지방선거가 열린 날"이라며 "불안감을 조성해 선거에 영향을 끼치려는 세력이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나 회장은 특히 아이들 실종 당일 와룡산에 올라갔던 함승훈(당시 11세) 군 진술에 주목한다. 함 군은 이날 오후 사촌형 2명과 와룡산에 올라가 '총성'을 들었다고 말했다. 함 군이 총성이 들린 장소로 지목한 곳은 훗날 아이들 유골이 발견된 세방골이었다.

나 회장은 함 군 증언을 근거로 당시 와룡산에 있던 모 군부대 연루 가능성을 조심스레 내놨다. 살해 도구가 '총'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다. 나 회장은 "유골 감정을 맡은 경북대 법의학팀이 개구리 소년 두개골에 난 상처는 '예리한 발사체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 주장에 대해선 이견도 많다. 2002년 당시 개구리 소년 유골 감정을 맡은 경북대 채종민 교수는 두개골 상처가 "화약 폭발에 의한 발사체인 소총, 권총 등에 의한 총상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2011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 제작진도 두개골 상처가 용접 망치로 때렸을 때 나오는 모양으로 보이고, 범행의 침착성·잔인함을 고려할 때 사이코패스 짓으로 의심된다는 추정을 내놨었다.

용접 망치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 사진입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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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소년' 사건 뒤 유족들 삶은 엉망이 됐다.

김종식 군 아버지 김철규 씨는 아들을 잃어버린 슬픔을 술로 달래다 2001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김영규 군 아버지 김현도 씨는 3년 전 뇌출혈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하다. 박찬인 군 아버지 박건서 씨는 생업을 그만두고, 막노동을 하다 무릎을 다쳐 걷기가 힘들다. 나 회장은 "저와 철원이 아버님이 챙기지 않으면, 사실상 추도식을 열기 힘들다"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대구 와룡산 세방골에서 열린 '개구리 소년' 26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술을 뿌리고 있는 우철원 군 아버지 우종우 씨(왼쪽)와 나 회장 / 뉴스1

나 회장은 2015년부터 경찰청 민간조사원(탐정) 입법추진 자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역시 '개구리 소년'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나 회장이 자문위 활동을 하는 이유는 하나다. 정식 탐정 자격을 얻어 대구 성서경찰서 캐비닛 한 편에 잠들어 있을 '개구리 소년' 사건 수사 기록을 보기 위해서다.

"1991년만 해도 사건과 관련해 베일에 싸인 게 많았다. 물고문해서 사람 죽이고, 그런 시대였으니까. 당시 과학수사가 발달되지 않았던 점도 아쉽다. 범인 몽타주까지 만들어 배포했고, 종식이네 집으로 종식이로 추정되는 소년의 전화까지 왔다. 이런 자세한 자료들이 다 성서경찰서에 있을 것이다"

나 회장은 점점 잊히고 있는 '개구리 소년' 사건에 대한 관심을 당부했다.

"언론이나 정치권은 그 이전까지 아무 관심도 없다가, 어린이 날쯤 돼서야 실종 아동에 관심을 갖는다. 불만이다. '개구리 소년' 사건은 공소시효가 끝났다. 범인도 아마 우리가 매해 여는 '개구리 소년' 추도식을 보고 있지 않을까. 세월이 지나면 뭐든지 진실은 밝혀진다. 마찬가지다. '개구리 소년' 사건 범인도 언젠가 잡힌다. 그렇게 믿고 있다.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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