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이한열 열사에 대한 9가지 사실

2017-12-2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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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 학생 이한열은 만 20살이었다.

민주화 열기가 한창 끓어오르던 19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도 시위가 열렸다. 연세대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교문으로 행진했다. 경찰과 학생들은 대치했다. 학생들 사이에는 경영학과 2학년 학생 이한열 열사도 있었다. 경찰은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을 발사했고 이한열 열사는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이한열 열사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다 결국 같은 해 7월 5일 숨졌다.

이한열 열사에 대해 알아야 할 9가지 사실을 소개한다.

1) 이한열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매우 분노했다.

2017년 1월 14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30주기 추모제 현장 / 뉴스1
2017년 1월 14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30주기 추모제 현장 / 뉴스1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 열사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고문을 당해 사망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알려지면서 1987년 봄부터 대학가에는 시위가 이어졌다. 이한열 열사도 매우 분노했다. 이한열 열사는 1987년 2월 직접 시를 써서 추모하기도 했다. 이한열 열사는 이 시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박종철 열사를 '우리 아이'라고 했다.

다음은 이한열 열사가 쓴 '박종철'이라는 시의 일부다.

열불 나는 세상이 물속에 잠겼다/ 우리 아이가 익사했다/ 뜨거운 정열과 불타는 의지가 물속에 잠겼다/ 우리 아이는 대학 3학년/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려다 그만/ 짐승의 발톱에 물려 죽었다/ 우리는 분노한다/ 이 시대의 인간임을 포기하고 싶다

2) 이한열은 만 20살이었다.

네이션 벤 전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기자가 찍은 이한열 열사 피격 직전 사진/ 이하 이한열 기념사업회
네이션 벤 전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기자가 찍은 이한열 열사 피격 직전 사진/ 이하 이한열 기념사업회

이한열 열사는 1966년 8월 29일 태어났다.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을 당시 나이는 불과 20세였다. 이한열 열사는 쓰러진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결국 숨졌다.

3) 쓰러진 이한열과 그를 부축한 이종창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네이션 벤 전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기자가 찍은 이한열 열사 사진
네이션 벤 전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기자가 찍은 이한열 열사 사진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한 남성이 달려와 이한열 열사를 부축했다. 이 남성은 도서관학과 2학년 학생 이종창 씨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이종창 씨는 최루탄 연기 속에서 쓰러진 학생을 발견했다. 쓰러진 학생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달려가 부축했다.

이종창 씨는 경찰을 피해 학교 안으로 가느라 쓰러진 학생이 그렇게 많이 다친 줄도 몰랐다고 회상했다. 이종창 씨는 시위가 끝나고 나서야 쓰러진 학생이 경영학과 86학번 이한열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종창 씨가 이한열 열사를 부축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은 역사를 바꿨다.

4) '역사를 바꾼 사진'을 찍은 사람은 정태원 전 로이터통신 사진기자다.

정태원 전 로이터통신 사진기자가 찍은 이한열 열사 사진. 이종창 씨가 이한열 열사를 뒤에서 안고 있다.
정태원 전 로이터통신 사진기자가 찍은 이한열 열사 사진. 이종창 씨가 이한열 열사를 뒤에서 안고 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이한열 열사와 그를 뒤에서 안은 이종창 씨. 로이터통신 특파원이었던 정태원 사진기자는 이 모습을 포착했다.

이창성 전 중앙일보 기자는 로이터통신에 사진 협조를 의뢰했다가 이한열 열사, 이종창 씨 모습이 담긴 사진을 봤다. 이창성 전 기자는 사진을 신문에 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중앙일보 지면에 사진이 실리면서 전 국민적 분노가 일었다. 사진은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5) 이한열은 "뒷머리가 아프다. 온몸이 마비되는 느낌이다"라고 호소했다.

이한열 열사가 당시 신고 있던 운동화 / 연합뉴스
이한열 열사가 당시 신고 있던 운동화 / 연합뉴스

최루탄을 맞은 이한열 열사는 응급실로 옮겨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의식이 있었다. "뒷머리가 몹시 아프다. 온몸이 마비되는 느낌이다"라고 호소했다. 오후 5시 30분쯤 이한열 열사는 의식을 잃었다. 혼수상태에 빠진 이한열 열사는 27일 만인 7월 5일 오전 2시 5분 끝내 세상을 떠났다.

6) 이한열은 마지막 순간까지 시위에 나갈 생각을 했다.

영화 '1987'에서 이한열 열사 역을 맡은 배우 강동원 씨 / 뉴스1
영화 '1987'에서 이한열 열사 역을 맡은 배우 강동원 씨 / 뉴스1

이한열 열사는 정신을 잃기 전에 "내일 시청(6·10 대회)에 나가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민주화 항쟁을 걱정한 것이다.

7) 경찰은 이한열 시신을 탈취하려고 했다.

영화 '1987' 스틸컷
영화 '1987' 스틸컷

이한열 열사가 사망하자 경찰은 '압수할 물건: 이한열의 사체 1구'라고 적힌 압수수색 영장을 들고 세브란스 병원에 들이닥쳤다. 당시 학생들은 장례식장을 지키며 시신을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 결국 경찰은 시신을 탈취하지 못했다.

8) 이한열 장례식에는 100만 인파가 모였다.

이한열 열사 장례식장 현장/ 연합뉴스
이한열 열사 장례식장 현장/ 연합뉴스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이 열렸다. 민주국민장으로 거행된 장례식에는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전국적으로는 약 160만 명이 참여해 추모를 했다. 추모 인파는 서울시청 광장에 집결했다. 경찰은 이날도 최루탄을 발사하고 곤봉을 휘둘렀다. 이한열 열사 장례식은 민주 항쟁 기폭제가 됐다.

9)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아들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한열 열사 기념비 어루만지는 베은심 여사 / 뉴스1
이한열 열사 기념비 어루만지는 베은심 여사 / 뉴스1

배은심 여사는 아들인 이 열사가 사망하자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배은심 여사는 "너무 억울하고 너무 분해서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2005년에는 국민 모금으로 '이한열 기념관'을 열었다. 이한열 열사 아버지는 아들이 사망하고 화병을 앓다가 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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