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미생도 슈퍼맨이 돼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

2014-12-21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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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미생' 포스터]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어려서부터 바둑판에 코를 박

[tvN '미생' 포스터]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어려서부터 바둑판에 코를 박고 지내느라 나이 26개를 먹을 동안 자격증 하나 딴 게 없고 고등학교도 검정고시로 마쳤다. 영어? 당연히 못했다.

그랬던 장그래(임시완 분)가 저 먼 요르단으로 건너가 영어를 자연스럽게 하며 도심에서 건물 사이를 뛰어넘는 추격전을 펼치고 산업스파이의 자백을 받아내는 데도 능수능란함을 보였다. 추격전 도중 달려오는 차에 치여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떨어졌음에도 특전사요원이 따로 없다. 그는 멀쩡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3년. 슈퍼맨의 탄생이다.

세포 하나까지 너무 현실적이라 전율을 줬던 tvN 드라마 '미생'이 마무리는 판타지로 했다.

[이하 사진= tvN '미생' 방송 캡처]

미생(未生: 바둑에서 완생할 여지가 있는 돌)은 내 모습이었지만 결국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완생(完生)도 아닌 슈퍼맨이 되어야 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씁쓸하게도 드라마는 마지막에서 보여준 꼴이 됐다.

물론 드라마적으로는 따뜻하고 짜릿한 판타지를 구현함으로써 스토리의 재미를 극대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미생'의 현실감에 열광했던 쪽에서는 한편으로는 허탈감에 휩싸일 듯하다.

우리 모두는 미생이며, 완생을 목표로 달려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 오늘도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사실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너무 높다는 것, 특히 장그래와 같은 미생의 경우는 더더욱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아이러니하게도 '미생'의 판타지가 보여줬기 때문이다.

tvN은 '미생'이 지난 20일 마지막 20화에서 평균 8.4%(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 기준), 순간 최고 10.3%를 기록하며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21일 밝혔다.

케이블, 위성, IPTV 통합 전연령 남녀 시청률 동시간대 1위의 성적이자, 남자 10대와 30대, 여자 20대와 30대 시청층은 지상파 포함 동시간대 시청률 1위라고 설명했다.

종영을 앞두고 지난 13일 시청률 8%를 기록했던 '미생'은 마지막회에서 다시 이를 경신하며 올해 방송된 케이블 드라마 최고의 기록을 냈다. 이는 지난해 말 큰 인기를 얻은 tvN '응답하라 1994'에 이어 케이블 드라마 사상 두번째로 높은 성적이다. '응답하라 1994'는 지난해 12월28일 마지막회에서 평균 11.9%, 순간 최고 14.3%로 역대 케이블 드라마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 탄탄한 원작의 힘…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미생'은 방송 내내 하루하루 출퇴근의 쳇바퀴 도는 삶 속에서 원인터내셔널이라는 상사의 일상과 그 속에서 펼쳐지는 인물 군상의 부딪힘과 하모니를 기막히게 그려내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이는 탄탄한 원작에 기반한 것이다. 윤태호 작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미생'은 원작이 구축해놓고 그려낸 세밀화 같은 직장과 조직의 풍경을 드라마로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원작을 각색한 정윤정 작가가 탈고 후 "앞으로는 남들이 말리면 안 하는 게 편한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토로했듯, 탄탄한 원작이라고 해도 그것을 드라마로 각색하는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실제로 '미생'은 작가들 사이에서 드라마화가 불가능한 작품으로 인식돼왔다. 그만큼 원작의 정밀함을 화면으로 표현해내는 게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었다.

그러나 드라마로 탄생한 '미생'은 원작을 충실히 살리면서도 입체감을 불어넣는 데 성공하면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어디서 다들 구해왔나 싶은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뛰어났다. 개성 있는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살아 숨쉬었고, 화면으로 들어가 안아주고 싶거나 한대 패주고 싶은 캐릭터들이 고루고루 어울려 긴장감과 재미를 높였다.

tvN은 이 드라마를 홍보하면서 '그래도 살 만한 세상'이라는 광고문구를 내세웠지만 정 작가는 그게 아니라 "너도 힘들지? 그래도 살아야하지 않겠냐"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실제로 드라마는 가진 것 하나 없고, 앞이 막막하기 그지없는 장그래의 처지를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어쩌겠냐. 이게 현실인 것을. 그래도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야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하지만 드라마는 현실의 벽은 높고 높지만, 그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 역시 사실임을 시종 강조하면서 잔인한 현실에 한줄기 희망을 안겨줬다. 오차장(이성민)이, 김대리(김대명)가 그랬고, 장그래의 세 동기가 그러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오차장과 김대리, 장그래가 원인터내셔널을 나와 다시 하나로 뭉치는 모습을 통해 조직을, 현실을 바꾸기는 어려워도,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서로에게 힘이 돼줄 수는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가슴을 적셨다.

◇ 슈퍼맨이 된 장그래…각박한 현실 오히려 강조

거기까지였다면 좋았을 것 같다. 내내 멋지게 달려왔던 드라마는 그러나 막판에 난데없는 액션 어드벤처 판타지를 펼치며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원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정규직 전환에 실패한 장그래가 오차장의 회사로 들어가게 되는 것까지는 드라마가 땅에 발을 딛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 드라마는 '인디애나 존스'와 '본 아이덴티티'를 결합한 듯한 슈퍼맨의 모험을 펼쳐보이며 장르의 전환을 꾀했다. 덕분에 눈은 재미있었다. 장그래가 맷 데이먼처럼 맨몸으로 이국 요르단에서 추격전을 펼치고 건물 사이를 뛰어넘고 차량에 부딪히는 액션 연기가 쉴 틈 없이 펼쳐져 보는 쾌감이 있었다.

그런데 왜소하고 힘없고, 액션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장그래는 언제 갑자기 이런 액션맨이 됐을까. 또 영어 울렁증이 있던 그는 언제 영어를 능숙하게 하게 됐을까.

그런 장그래의 모습은 대기업상사에서는 정규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지만, 작은 회사에서도 그가 단기간에 슈퍼맨처럼 성장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해 씁쓸함을 안겨줬다.

제작진은 막판 시청자 서비스 차원에서 오락적인 재미를 극대화한 판타지를 구현했을지 몰라도, 드라마의 이러한 결말은 각박한 현실을 오히려 강조하고 말았다.

안정적인 삼시세끼를 위해 치사하고 더러워도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미생들에게 막판 슈퍼맨 장그래의 모습은 그리 위로가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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