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안 받으면 안 썼을 텐데" 통장 잔고 멍들게 하는 '시발비용'

2017-02-09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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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utterstock "시발비용이 뭐냐고요? X발 X발 하면서 돈을 써서 시발비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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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비용이 뭐냐고요? X발 X발 하면서 돈을 써서 시발비용이에요"

금융업계에 종사하는 박희주(여・31) 씨는 4년 차 직장인이다. 박희주 씨는 최근 직속 상사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직속 상사가 업무 성과를 가로채서 보고하는 걸로도 모자라 시도 때도 없이 사소한 트집을 잡아서다.

스트레스가 한계점에 도달한 박 씨는 사직서를 쓰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먹고사니즘'에 항복했다. 사직서를 내지 못 한 박희주 씨는 퇴근하자마자 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백화점 화장품 코너로 달려갔다. 평소 쓰던 것보다 훨씬 비싼 립스틱과 아이섀도를 구매했다. 백화점 지하 식품 코너에 들러 수입맥주도 샀다.

박희주 씨는 위키트리에 이 같은 사연을 소개하며 "집에는 뭘 타고 간 줄 아냐?"고 질문했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 하루 종일 사람한테 시달렸는데 버스에서까지 사람한테 치이기 싫었다"

박 씨가 이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쓴 돈은 11만 3000원이다. 박희주 씨는 "큰 돈이라면 큰 돈이지만 그렇게 스트레스 받아 가며 돈 버는데 이 정도도 못 쓰면 뭐 하러 돈을 버나 싶어 보상 심리로 돈을 썼다"고 말했다. 이어 "물론 '시발비용'은 통장 잔고를 멍들게 하죠"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 트위터 이용자가 만든 신조어 '시발비용'

'오월암 더 본즈커크' 제공

'시발비용'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한 건 지난해 11월 28일이다. '오월암 더 본즈커크'라는 닉네임을 가진 트위터 이용자(이하 '오월암')가 올린 트윗이 엄청난 관심을 받으며 유행어가 됐다. '오월암'은 시발비용에 대해 "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쓰지 않았을 비용"이라고 정의했다. 또 "스트레스 받고 홧김에 치킨 시키기, 평소라면 대중교통 이용했을 텐데 짜증 나서 택시 타기"라고 예를 들었다.

'시발비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스트레스를 받아 충동적으로 쓰는 소소한 비용이다. 계획에 없던 지출을 '과소비'로만 여기던 과거 인식과 달리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이 정도는 써도 된다"는 정당성이 부여된다는 것이 '시발비용'의 특징이다.

직장인인 '오월암'은 "친구들과 '시발' 소리를 섞어가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쓴 비용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쓴 트윗"이라고 위키트리에 말했다. 가장 많이 쓰는 '시발비용'은 퇴근 후 시켜먹는 치킨이라고 했다.

신조어 '시발비용'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것에 대해 그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줘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외롭지 않다는 생각에 큰 위안이 들었다"고 말했다.

◇누구나 자기만의 '시발비용'이 있다

입시상담하는 학생들, 해당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 뉴스1

직장인들만 '시발비용'을 쓰는 건 아니다. 액수가 다를뿐 알바생이나 용돈을 받는 중고등학생들도 '시발비용'을 쓴다. 서울시 강동구에 위치한 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현승민(18) 군은 학원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평소보다 비싼 음식을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현승민 군은 "평소에는 학원 끝나고 맥도날드에 가는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좀 더 비싼 버거킹에 간다"면서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더 비싼 걸 먹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카페에서 알바를 하는 대학생 김정현(남·23) 씨는 '진상 고객'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많다. 김 씨는 "7000원이 안 되는 시급을 받고 있어 '시발비용'을 맘껏 쓰지는 못 한다"면서 "그래도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하긴 하니까 코인노래방이나 인형뽑기 같이 적은 돈으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고 말했다.

◇ '시발비용'은 스트레스에 도움 된다 vs 충동적 소비로 인해 또 다른 스트레스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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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비용'은 스트레스 해소에 정말 도움이 될까? 일각에서는 충동적으로 쓴 '시발비용'이 더 큰 스트레스를 낳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시발비용'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냐"는 질문에 "그렇다. 순간적으로는"이라고 말했다. 곽 교수는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스트레스가 해소가 되는 것"이라며 "'시발비용'으로 스트레스 수치도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

곽 교수는 "문제는 충동적인 소비 후에 오는 후회감"이라며 "스트레스 수치가 낮아지지만 그게 얼마나 지속되냐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실제 직장인 이아린 씨(여・29)는 '시발비용'을 썼다가 또 다른 스트레스를 받은 경험이 있다. 이 씨는 회사 생활이 지겨워 무작정 적금을 깨고 파리행 비행기를 끊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씨는 "여행을 다녀오니 기분 전환은 됐지만 문제는 '텅장(텅빈 통장)'이 되어버린 통장이었다"며 "언제 그 돈을 다시 모으나 싶어 또 스트레스를 받게 되더라"라고 말했다.

곽금주 교수는 "'시발비용'을 쓸 때 억지로 합리화를 시키기보다는 적절한 비용을 정해두거나 어차피 사야 할 품목을 사는 것이 스트레스를 건강하게 해소하는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미래에 대한 투자는 사치, '오늘만 사는' 젊은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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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도 '스트레스'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스트레스가 '시발비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최근 젊은층이 '시발비용'에 크게 공감하는 이유에 대해,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가 닫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구정우 교수는 "한국 사회가 취업의 문도 닫혀있고, 계급 상승의 기회도 줄어들고 있고, 공정하지도 못 하다"며 "이런 구조적 문제를 소비와 연결해보면 젊은층은 돈을 모아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기성세대와 달리 현실에 충실한 소비를 한다"고 설명했다. 구 교수는 "집을 사는 등 미래를 준비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버겁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직장인 남정현(남・27) 씨는 "지금 연봉으로 '내 집 마련'은커녕 전세 구하기도 어렵다. 결혼 비용, 육아 비용에 대해서는 감도 안 온다"며 "티끌 모아 티끌이란 생각에 저축하기보단 그냥 돈을 쓰는 편"이라고 토로했다.

구정우 교수는 '시발비용' 유행 원인에 대해 젊은층이 상대적으로 스트레스에 취약하다는 점을 꼽기도 했다. 구 교수는 "젊은층은 기성세대보다 개성이 강하고 인권의식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사회의 억압을 못 견뎌하고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이런 성향이 '시발비용'이라고 아는 소비 패턴과 이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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