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웅 이순신에 대한 의외의 사실 7가지

2017-03-0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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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ickr 고조선 이래 한국사에서는 수많은 영웅이 피고 졌다. 각자 최애(최고애정)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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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이래 한국사에서는 수많은 영웅이 피고 졌다. 각자 최애(최고애정) 영웅도 다르다. 하지만 "성웅(聖雄)이 누구냐"라고 물으면 대부분 한 명으로 통일된다. 바로 이순신(李舜臣·1545~1598)이다.

성웅은 성인과 영웅을 합친 말이다. 비유하자면 영웅은 그냥 커피, 성웅은 T.O.P다. 사실 이순신이 남긴 업적을 보면 T.O.P도 부족하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초기 한산도대첩(1592)에서 병사 3명만 잃고 왜군 700명과 적함 59척을 섬멸했다. 특히 명량대첩(1597)에서는 맵핵이라도 쓴 것 마냥 판옥선 12척으로 왜군 병력 4분의 1(133척 가운데 31척)을 격파했다.

하지만 우리는 킹갓엠페러제너럴 이순신에 대해 잘 모르는 부분도 있다. 성웅 이순신에 대한 의외의 사실 7가지를 소개한다.

1. 이순신을 장군이라 부르는 건 굉장한 실례다

임진왜란이 끝난 1604년, 선조는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순신에게 이런 시호를 내린다.

"유명수군도독 조선국 증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덕풍부원군 행 정헌대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 충무공(有明 水軍都督 朝鮮國 贈 效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德豐府院君 行 正憲大夫 全羅左道 水軍節度使兼 三道水軍統制使)"

글자수 세기 프로그램에 넣어 보니 딱 64자. 해석하면 "해군참모총장 겸 해군 작전사령관 겸 함대사령관 겸 대한민국장·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총리급 명예직 겸 명나라 해군 원수 겸 부통령"이라는 뜻인데 여하튼 갓 중에 갓이라는 말이다.

여기 '이빠'로 유명했던 정조(1752~1800)는 이순신을 영의정으로 추증하며 "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兼 領 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라는 호칭을 추가한다. 홍문관, 예문관 등은 영의정이 되면 자동 임명되는 직이다.

이순신은 공식 직함만 80자가 넘는다. 장군 한 단어로 눙치는 게 굉장한 실례인 이유다. 또 해군에서는 장성을 장군 대신 제독이라 부른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 대신 '이순신 제독'이나, 시호 '이 충무공'으로 부르는 게 맞다.

2.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임진왜란이 아닌 조선 태종 때 처음 나온다

조선왕조실록 / Wikipedia

사서에 거북선이 처음 등장한 건 조선 태종(1400~1422) 때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3년(1413년) 5월 초 기사를 보면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가다 거북선이 왜선으로 꾸민 배와 싸우는 모습을 봤다"는 글이 나온다.

이후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증발했다가 임진왜란 원년(1592) 이순신의 난중일기로 180년 만에 컴백한다. 이순신은 이 해 2월 8일 "거북선에 사용할 돛 베 29필을 받다"라고 적었다.

때문에 태종 때 거북선과 이순신 때 거북선이 같은 것인지 학계에서는 추론이 분분하다.

3. 우리가 익히 아는 이순신 얼굴은 실제 모습과 상당히 다를 가능성이 높다

'이순신 얼굴' 하면 100원짜리에 새겨진 번들번들하고 인자한 표정을 떠올리는 이가 많겠지만, 실제 역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말과 웃음이 적다(류성룡 '징비록')", "얼굴이 후덕하지도, 풍만하지도 않다(고상안 '태촌집')" 등 당대 기록과 조선 후기에 그려졌다는 초상화를 토대로 한 이순신의 얼굴은 떡볶이를 철근 같이 씹어먹을 듯한 상남자 스타일이다.

100원짜리 뒷면에 새겨진 그림은 국가표준영정인 '이순신 영정'으로 1953년 장우성(1912~2005) 화백이 그렸다. 다만 이 영정은 관련 자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그려져 "고증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있다.

이순신 초상

4. 이순신의 죽음은 '자살'이라는 설이 있다

이른바 "이순신이 선조와의 갈등과 정치적 문제로 노량대첩에서 죽음을 택했다"는 내용인데 숙종(1661~1720) 때 예조판서를 지낸 이민서가 엮은 책 '김장군전(金將軍傳)' 속 문장이 그 근거라고 한다.

"이순신은 한창 싸우는 중에 투구를 벗고서 스스로 탄환에 맞아 죽었다(方戰免冑, 自中丸以死)"

이게 꽤 뜨악한 주장이라 반론도 만만치 않다. 노승석 전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교수는 이순신 자살설이 단어 '면주(免胄)'를 잘못 해석한 결과라며 이 주장을 일축했다.

노량해전 당시 상황을 묘사한 '정왜기공도병' / Wikipedia

노 전 교수는 "면주는 (중국의 고서) '춘추'에 나오는 말로 '장수가 결사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 일반적 해석"이라며 "즉 (이순신이) 죽기를 각오하여 투구를 벗고 결사적으로 싸웠다는 거지 자살을 뜻한 게 아니"라고 월간조선에 말했다.

노 전 교수는 또 "이민서가 이순신의 명량대첩을 칭송한 '명량대첩비'에서는 '진영에 임하여 운명하니, 마침내 몸을 바쳐 순국했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며 같은 인물이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전혀 다르게 묘사한 점도 지적했다.

노 전 교수는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기록된 여러 사료를 보면 대부분이 '최후에 적들의 화살과 총탄을 무릅쓰고, 직접 나아가 홀연히 탄환에 맞아 죽었다'고 묘사된다"며 "따라서 이순신은 (자살이 아닌) 투구를 벗고 결사적으로 작전을 지휘하다가 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분석했다.

5. 이순신의 취미는 승경도놀이였다. 이는 지금의 보드게임과 비슷하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이 승경도놀이를 즐겨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승경도놀이는 가장 먼저 높은 관직을 얻는 사람이 이기는 방식으로,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보드게임이다.

규칙은 부루마불과 비슷하다. 9품부터 1품까지 관직이 적힌 종이 위에 주사위나 나무막대를 굴려 말을 이동시킨다. 문과, 무과, 은일, 남일 4개 가운데 하나를 출발점으로 택한다. 최종점인 봉조하(奉朝賀)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승리한다.

어떤 벼슬을 갖느냐에 따라 발휘 능력이 다르다. 예를 들어 왕을 가까이 모시는 홍문관은 자기보다 높은 벼슬의 플레이어를 파면할 수 있다. 왕의 측근이라서다. 일명 '어그로' 요소가 강한데 어쩌면 이게 바로 이순신의 넘사벽급 전투 IQ 원천이었을지 모른다.

승경도놀이 / 한국세시풍속사전

6. 처갓집에서 11년을 살았다

이순신은 전남 보성군수 방진(方震·1514~?)의 외동딸과 혼인해 3남 1녀를 뒀다. 이순신은 결혼 첫 해인 21살부터 무과에 급제하는 32살까지 처가에서 살았다.

당시만 해도 남귀여가라는 풍속이 있었다. 처가에서 혼례를 치른 남자가 그대로 살다가 자녀를 낳아 성장하면 본가로 오는 풍속이다. 고구려 서옥제(壻屋制)에서 비롯돼 가부장제가 본격화한 조선시대에는 기간이 1~2년 정도로 짧아졌다.

이순신은 그럼에도 11년을 처가에서 살았다. 이에 대한 그럴 듯한 설명으로 '처가 갑부설'이 있다. 부유한 처가의 전폭적 지원 속에 과거 공부하며 셔터맨 노릇했다는 것이다. 물론 진실은 저 너머에...

7.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명언은 사실 적이 아닌 아군에게 한 말이다

이순신은 노량해전(1598)에서 왜군 흉탄에 맞아 사망했다. 그는 사망 전 이런 유언을 남긴다.

"싸움이 지금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이는 서애 유성룡(柳成龍·1542~1607)이 임진왜란 때 쓴 수기 '징비록'에 나오는 말로,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1566~1619)이 쓴 '충무공행록'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한때 진위 논란이 있었지만 '승정원 일기' 등 정사(그 정사가 아니다)에도 언급된 점을 미뤄볼 때 사실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 문구가 "적을 향해 말한 것"이라고 아는 사람이 일부 있다. 사실은 아군에게 말한 것이다. 원문(戰方急 愼勿言我死·전방금 진물언아사)을 보면 알겠지만, 이순신이 유언 중 적을 언급하는 대목은 없다.

아군의 사기 감소를 막으려 자기 죽음을 비밀에 부쳤다는 게 더 타당한 해석이다. 이순신의 먼치킨(초인) 이미지가 워낙 강하다 보니 "내 죽음을 알면 왜군 사기가 올라 전쟁에서 질 것"이라는 낭설이 의심없이 받아들여진 셈이다.

KBS1 '불멸의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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