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사상 처음으로 보물 지정을 전격 취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2025-03-11 14:40
add remove print link
대명률 보물서 제외... 도난품 사들여 보물로 지정받은 사실 드러나

도난당한 고서를 사들여 보물로 지정받은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된 '대명률'이 보물에서 제외된다. 국보와 보물 같은 국가지정유산이 취소된 첫 사례다.
국가유산청은 11일 "문화유산위원회 동산문화유산 분과가 최근 회의에서 '대명률' 보물 지정을 취소하는 행정처분 계획을 논의해 가결했다"고 밝혔다. 2016년 보물 제1906호로 지정된 지 9년 만에 내려진 결정이다.
문화유산위원회는 "허위 지정 유도로 형이 집행됐기 때문에 후속 조치를 위한 것"이라며 "법률 자문을 거쳐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대명률'은 중국 명나라의 형률을 다룬 서적으로 조선시대 형법의 근간이 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아 왔다. 대명률은 명나라 홍무제 시기인 1389년(홍무 22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며, 명나라 형법 체계를 집대성한 법전이다. 총 30권으로 구성돼 있으며, 형벌과 범죄 처리를 규정한 조문 460조가 담겨 있다. 조선은 이를 바탕으로 법제를 정비했고, 특히 조선 초기 법률 편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국내외에 전해진 사본이 거의 없는 희귀본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가유산청은 2015~2016년 보고서에서 "조선 전기 서지학 연구와 법률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대명률'은 보물 지정 4개월 만인 2016년 논란에 휩싸였다. 경기북부경찰청이 사찰과 고택 등에서 문화유산을 훔친 도굴꾼과 절도범을 검거하며 '대명률'이 장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11년 도난 신고된 상태였다. 경북 경주 육신당은 1998년쯤 현판과 고서 등 81건 235점이 사라졌다고 신고했고, '대명률'도 그중 하나였다. 수사 결과 경북의 사립 박물관장 A씨가 2012년 장물 업자로부터 1500만 원에 '대명률'을 사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A씨는 "선친에게 물려받았다"며 출처를 속이고 보물 지정을 신청했다.
A씨는 장물 매입 사실이 적발돼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징역 3년 실형이 확정됐다. 국가유산청은 법원 판결 후 후속 조치를 검토해 왔으며, 보물 지정에 중대한 하자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이에 행정기본법을 근거로 지정 취소를 결정했다.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문화유산 가치가 상실돼 지정을 해제한 적은 있어도 국보·보물급 지정 취소는 처음"이라고 밝혔다.
학계에선 국가유산 지정 과정에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보·보물 지정은 소유자 신청 후 지자체가 자료를 준비해 국가유산청에 보고하고, 시·도문화유산위원회와 문화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친다. '대명률'은 2013년 경북 영천시를 통해 신청됐고, 경북도문화유산위원회 심의와 전문가 3명 이상의 조사를 거쳐 지정됐다. 하지만 2011년부터 국가유산청 누리집에 도난 사실이 공개돼 있었고, 경주와 영천이 같은 경북 지역인 점을 감안하면 출처 검증이 가능했다는 지적이 있다. 한 전문가는 "희귀 자료인 만큼 가치뿐 아니라 소유 정보와 출처를 면밀히 확인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대명률'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임시 보관 중이며, 국가유산청은 조만간 취소 계획을 누리집과 관보에 공고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