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보성 봉화산에서 “차향 머금은 길, 친구와 걷다"
2025-05-18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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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향 숲길과 웃음 가득한 동행
[위키트리 광주전남취재본부 노해섭 기자]삶의 속도는 제각각이지만, 마음의 간격은 매달 한 번 가까워진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쁘게 살아가던 친구들이 매달 한 번씩 모이는 시간. 이번 목적지는 전남 보성군의 봉화산이다. 광주시청 앞 등기국에서 만나 두 대의 차량에 몸을 싣고 남쪽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승용차 안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그동안 안부를 묻고 왁자지껄 이야기가 오갔다.
해발 476m, 높지 않은 산이지만 봉화산은 단단한 존재감을 지닌다. 보성읍과 득량면의 경계에 서 있는 이 산은 호남정맥의 한 줄기로, 오랜 세월 동안 지역의 신앙과 전통을 지켜온 터전이다. 가뭄이 길어지면 기우제를 지내고, 행사 때에는 성화를 채화하던 신성한 장소다. 지금도 정상에는 봉수대가 복원돼 당시의 흔적을 전한다.
이날의 산행은 2번 국도변 ‘기러기재’에서 출발해 ‘봇재’까지 약 10km를 걷는 코스.
등산로 초입에는 봉화산 안내도가 세워져 있고, 호남정맥길과 이어지는 아치형 다리가 국도 위를 가로지른다.
첫걸음을 떼자 편백나무 숲이 짙은 피톤치드로 반긴다. 비가 내린 다음 날이라 길은 촉촉했지만, 부드러운 흙길과 완만한 경사 덕분에 걷는 내내 발걸음이 편안하다.
지그재그 오르막을 따라 걷다 보면 ‘풍치재’에 다다른다. 하늘은 아침의 흐린 표정을 벗고 맑은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이어 만나는 배각산(417m)을 지나 드디어 봉화산 정상에 도착.
정자인 ‘봉화정’과 복원된 봉수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봉화정에서 친구들이 준비해온 음식과 막걸리를 나누며 잠시 쉼표를 찍는다. 낯설지 않은 얼굴들과의 오랜만의 담소에 시간도, 피로도 잊혀진다. 이날은 산행에 처음 나온 친구가 있어서 형식적이지만 신고식도 있어 마냥 즐거웠다. 또한 이곳 봉화정과 봉수대에서 친구들과 인생샸을 남겼다.
하산길은 또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다. 키 작은 산죽이 터널처럼 길을 감싸고, 그 아래로는 단정한 녹차밭이 펼쳐진다. 정성껏 가꾼 듯한 소규모 차밭과 붉은 기와의 펜션이 어우러지며 이국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 구간은 사람의 손길과 자연이 공존하며 빚어낸 평화로운 조화였다.
봇재에 이르며 여정은 끝을 향해 간다. 발걸음을 돌려 향한 곳은 보성 율포해수욕장 앞 식당. 사전에 예약해둔 식당에서 푸짐하게 늦은 점심으로 허기를 달래고, 근처 율포해수욕장을 거닐며 마지막 여운을 만끽한다. 파도 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가족 단위 피서객들의 웃음소리가 휴일의 여유를 더했다.
그날 봉화산은 높은 산도, 깊은 계곡도 아니었지만, 함께 걷는 발걸음마다 이야기로 채워지는 특별한 장소였다. 숲길의 포근함, 그리고 오랜 친구들과의 조용한 웃음. 봉화산은 그렇게 또 하나의 계절을, 또 하나의 추억을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