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욕망 다뤘는데 터졌다…칸 영화제서 1등 찍고 기립박수 받은 '한국 영화'

2025-05-23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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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 사로잡은 한국 영화
노년 여성의 욕망 정면으로 다룬 영화 '첫여름', 칸 영화제 1등상 쾌거

허가영 감독의 단편 영화 '첫여름'이 제78회 칸 국제영화제 '라 시네프' 부문에서 1등상을 거머쥐며 한국 영화계에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이 작품은 노년 여성의 욕망을 정면으로 다룬 파격적인 소재로 현지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영화 '첫여름' 주연 배우 허진 / 한국영화아카데미
영화 '첫여름' 주연 배우 허진 / 한국영화아카데미

22일(이하 현지 시각) 프랑스 칸의 팔레 드 페스티벌 뷔뉴엘 극장에서 열린 '라 시네프' 시상식에서 허가영 감독은 최고상인 1등상 수상자로 호명됐다. 라 시네프는 전 세계 영화학교 학생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부문으로, 올해 646개 영화학교에서 2679편이 출품된 가운데 최종 16편만이 선정됐다.

특히 허가영 감독은 한국인 최초로 라 시네프 부문 1등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과거 2021년 윤대원 감독의 '매미', 2023년 황혜인 감독의 '홀'이 각각 2등상을 수상한 바 있지만, 한국인 감독이 1등상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제 78회 칸 국제영화제 ‘라 시네프’ 경쟁 부문에서 한국인 최초로 1등상을 수상한 ‘첫여름’의 허가영 감독 / 뉴스1
제 78회 칸 국제영화제 ‘라 시네프’ 경쟁 부문에서 한국인 최초로 1등상을 수상한 ‘첫여름’의 허가영 감독 / 뉴스1

'첫여름'은 노년 여성 영선이 손녀의 결혼식 대신 연하 남성 학수의 49재 참석을 고민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카바레에서 만난 학수에게 지속적으로 연락하지만 응답받지 못하던 영선은, 학수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공교롭게도 학수의 49재와 손녀 석연의 결혼식 날짜가 겹치면서 영선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작품의 핵심은 노년 여성의 내밀한 감정과 욕망을 거침없이 그려낸 점이다. 영선이 학수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남편에게서 채우지 못했던 정서적 갈증을 해소하려는 자아실현의 욕구로 표현됐다. 이날 상영에서 '첫여름'은 라 시네프 진출작 중 관객들의 가장 큰 기립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영화 '첫여름' 스틸컷 / 한국영화아카데미
영화 '첫여름' 스틸컷 / 한국영화아카데미

허가영 감독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회사원으로 일하던 중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지원했다. 7분짜리 영화로 합격해 정규과정 41기를 수료했다. '첫여름'은 그의 졸업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21일 뉴스1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첫여름')는 굉장히 각별한 이야기인데 이렇게 좋은 결과가 있어서, 그리고 다양한 관객들을 만날 수 있는 게 큰 기쁨"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외할머니와의 경험이었다. 허 감독은 "외할머니와 같이 살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한국에는 할머니에 대한 통념이 있지 않나, 손주들에게 따뜻한 밥 차려주는 이미지가 있는데 저희 할머니는 차갑고 어떻게 보면 좀 삐뚤어진 그런 모습들이 있으셨다"며 "외모를 꾸미시는 정말 멋쟁이셨다. 왜 우리 할머니는 다를까 저 여자는 뭘까 이런 호기심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여성의 욕망에 대한 관심을 갖고 영화를 만들게 됐다는 허 감독은 "여성의 욕망에 대한 영화들은 아주 억제되거나 혹은 지나치게 분출되거나 그 둘 중의 하나인 것 같은데 여성 본연의 입체적인 욕망과 그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향후 작품의 방향성을 밝혔다.

노년 여성의 욕망을 다룬 영화 '첫여름' / 한국영화아카데미
노년 여성의 욕망을 다룬 영화 '첫여름' / 한국영화아카데미

이번 라 시네프 부문에서는 허 감독의 '첫여름' 외에도 다양한 국가의 작품들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2등상은 중국 추즈정 감독의 '12 Moments Before the Flag-Raising Ceremony'가 받았고, 3등상에는 일본 미키 타나카 감독의 'GINGER BOY'와 에스토니아 나탈리야 미르조얀 감독의 'Winter in March'가 공동 수상했다.

지난 13일 개막한 제78회 칸 국제영화제는 오는 24일까지 프랑스 남부 도시 칸에서 진행된다. 개막작은 아멜리 보냉 감독의 '파르티르 엉 주르'(Partir un jour)가 선정됐다.

영화 '첫여름' 트레일러 / 유튜브,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특히 올해 칸 영화제에서는 한국 장편영화가 공식 부문에 단 한 편도 초청받지 못해 우려를 낳았지만, 허 감독의 1등상 쾌거로 자존심을 지켰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2022) 이후 경쟁 부문에 3년째 진출하지 못하면서 한국 영화 위기론이 제기되던 중이었다.

허 감독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이렇게 한국 영화가 많이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내가 어떤 감독이 될 수 있을까' 고민이 조금 더 많아진다"며 책임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단편영화 ‘첫여름’을 연출한 허가영 감독     / 뉴스1
단편영화 ‘첫여름’을 연출한 허가영 감독 / 뉴스1

라 시네프 1등상 수상으로 허 감독은 특별한 혜택도 받게 된다. 작품은 칸 영화제 이후 파리에서 별도 상영되며, 향후 첫 장편영화 제작 시 크레딧에 칸 영화제 지원을 받았다는 문구가 포함된다.

이번 성과는 한국 영화계에 희망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젊은 여성 감독이 파격적인 소재로 국제 무대에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home 윤희정 기자 hjyun@wikitr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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