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 햇살 아래 시작된 천재들의 우정, 편지 115통으로 되살아나다
2025-07-2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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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햇살 아래 시작된 30년 우정
세잔과 졸라가 주고받은 편지 115통
프로방스의 뜨거운 햇살이 아르크 강을 금빛으로 물들이던 19세기 중반, 엑상프로방스의 한 중학교 복도에서 두 소년이 만났다. 지역 은행 창업주의 아들 폴 세잔과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 토목기사의 아들 에밀 졸라. 운명처럼 시작된 이들의 인연은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115통의 편지로 이어져,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금빛으로 된 우리 둘의 이름은 첫 장에서 하나 돼 반짝이고, 형제애로 뭉친 천재들 가운데 후세에도 늘 함께 전해지는 것이지." 1860년 3월 25일, 스무 살 청년 에밀 졸라가 친구 세잔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마치 예언처럼 들리는 이 문장은 그로부터 16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현되고 있다. 세잔과 졸라라는 두 이름은 여전히 함께 호명되며, 그들의 우정은 시간을 초월한 예술적 동반자의 전형으로 남아있다.
폴 세잔은 인상주의를 넘어 현대 미술의 기초를 닦은 위대한 화가다. 그의 작품은 빛과 색, 형태의 혁신적인 조화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탐구했다. 세잔의 캔버스는 단순한 풍경이나 정물이 아니라, 시각적 경험을 재구성하는 철학적 여정이었다. 그는 사물의 본질을 기하학적 형태로 분해하고, 색채의 미묘한 변화로 공간을 재창조하며 후대 화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줬다. 피카소가 "우리의 아버지"라 칭하며 존경을 표한 세잔은, 회화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미술 언어를 창조한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에밀 졸라는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인간의 삶과 사회의 어두운 면을 날카롭게 파헤친 소설가다. 그의 대표작인 '루공-마카르 총서'는 19세기 프랑스 사회를 해부하며 계층, 유전, 환경이 인간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졸라의 문장은 예리한 관찰력과 강렬한 서사로 독자를 사로잡았으며, 그의 작품은 문학뿐 아니라 사회 개혁의 촉매로 작용했다. 특히 '나는 고발한다'로 대표되는 그의 사회적 발언은 예술가의 책임과 용기를 상징한다.
폴 세잔 탄생 200주년을 맞아 소요서가에서 출간한 '교차된 편지들 1858-1887'은 인상파 화가 폴 세잔과 자연주의 문학의 거장 에밀 졸라가 30년간 주고받은 편지들을 완역한 책이다. 2016년 프랑스 갈리마르 판을 저본으로 평생을 졸라 연구에 헌신한 권위자 앙리 미테랑이 시간순으로 배열하고 상세한 해설을 더했다. 636쪽에 달하는 이 방대한 기록은 단순한 서신집을 넘어 19세기 프랑스 예술사의 생생한 증언이자 두 거장의 정신적 자화상이다.
새침한 파리지앵에다 몽상가적 기질을 가진 졸라를 또래 아이들이 놀릴 때 세잔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시작된 우정. 그 후 두 소년은 바유라는 친구와 함께 '삼총사'를 이뤄 프로방스의 자연을 벗 삼아 문학과 예술을 토론하며 순수한 우정을 키워갔다. 학교가 끝나면 아르크 강과 들판에서 수영과 낚시를 즐기고, 생트빅투아르 산을 오르며 사냥을 했다. 세잔은 언제나 스케치북과 물감 상자를 챙겨왔고, 졸라의 망태 자루에는 시집과 문학전집이 담겨 있었다. "태양과 물과 책, 이 세 가지야말로 젊은 날의 졸라와 세잔을 키운 자양분이었다."
지중해의 빛과 바람, 그리고 책 속의 문자들이 만들어낸 이 목가적 풍경은 훗날 세잔의 화폭과 졸라의 문장 속에서 영원한 생명력을 얻었다. 세잔의 그림은 프로방스의 햇살과 산, 나무의 형태를 기하학적 구조로 재해석하며 시각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졸라의 소설은 인간의 욕망과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포착해 문학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도구임을 증명했다. 프로방스에서 함께한 우정과 형제애의 기억은 두 예술가의 창작 세계를 관통하는 원동력이 됐고, 그들이 아카데미즘의 벽을 뛰어넘어 새로운 예술 세계를 개척할 수 있게 한 정신적 뿌리가 됐다.
그러나 운명은 두 친구를 갈라놓았다. 졸라는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1858년 경제적 궁핍 속에서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이주했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졌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오히려 편지를 통해 더욱 깊어졌다. "네가 엑스를 떠난 뒤, 친구여, 슬픔의 그림자가 나를 짓누르고 있어. 정말로, 거짓말이 아니야.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야.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는 어리석고 굼뜬 인간이 됐지." 1858년 4월 9일, 세잔이 졸라에게 보낸 편지 속 문장들은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절절했는지 보여준다.
오스만의 대개조(오스만은 시민 생활 개선, 환경 회복, 도시 재생이라는 공공이익을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토지수용권을 행사해 파리를 대개조했다)가 한창이던 파리의 외곽지에 있는 허름한 옥탑방에서 졸라는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하루하루를 견뎠다.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의지로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해 갔다. 한편 세잔은 권위적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시작한 법학 공부를 포기하고, 파리와 엑스를 오가며 인상주의자들과 교류하며 화가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두 친구의 성향은 극명하게 달랐다. 신중하고 세련된 매너와 뛰어난 필력으로 파리의 문학·예술계에서 입지를 다져가는 졸라와는 달리 세잔은 단정치 못한 행색과 거친 매너로 파리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부자 아버지로부터의 용돈이 끊길까 두려워 동거녀와 아들의 존재를 숨기며 연이은 살롱전 탈락과 혹평 속에서도 세상과의 괴리를 견디며 꿋꿋이 그림을 그리는 세잔의 모습은 깊은 연민을 자아낸다.
그럼에도 두 친구는 서로를 향한 믿음과 격려를 놓지 않았다. "너를 가로막는 성벽을 넘을 수 있게 네게 용기를 주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회화나 데생에 관해 한번 이야기해 볼까? 고약한 성벽, 고약한 회화 같으니라고! 하나는 정전에 도전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의 반대로 짓눌려 있지." 1859년 12월 30일 졸라가 세잔에게 보낸 편지는 친구의 고뇌를 함께 나누려는 따뜻한 마음이 배어 있다.
"용기를 내. 네가 여태까지 했던 것 모든 게 의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려면 수년간의 연구와 끈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잊지 마. (나도 너와 같은 처지이고, 생각대로 형태가 나오지 않을 때가 있어. 우리에겐 좋은 생각이 있으니, 우리의 들판 길을 진실하고 당당하게 걸어가자. 신께서 우릴 인도하실 거야!)." 1860년 7월 말 세잔이 졸라에게 보낸 편지는 서로를 향한 불변의 믿음을 보여준다.
편집자이자 졸라 연구의 대가 앙리 미테랑은 이 방대한 서신들을 총 다섯 시기로 구분했다. 1858-1860년 '함께하는 삶으로의 부름', 1861-1864년 '낙선자들', 1865-1870년 '살롱전을 오가며', 1871-1877년 '인상주의-라는 표현의 운명', 1878-1887년 '흘러간 날들의 인상'으로 나뉜 각 시기는 두 예술가의 성장 과정과 19세기 프랑스의 역사적 격변을 동시에 보여준다.
미테랑은 이를 시간순으로 교차 배열해 각 시기의 주요 전기적 사실과 역사적 맥락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더했다. 덕분에 독자들은 격동의 19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두 거장이 삶과 예술 전반에 걸쳐 서로를 격려하고 지지하며 나눈 대화를 직접 듣는 듯한 생생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세잔의 예술은 단순한 시각적 재현을 넘어,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 여정이었다. 그의 작품은 후대에 큐비즘, 추상미술 등 현대 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열었으며,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 같은 거장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졸라 역시 문학의 경계를 확장하며, 사실주의를 넘어 자연주의라는 새로운 문학적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의 소설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는 강력한 도구로 작용했으며, 이는 현대 문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시간이 흘러 두 친구의 삶은 각각 다른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1877년 8월 24일 세잔이 졸라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예술가들이 처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요즘 나는 풍경 습작을 하려고 매일 이시 공원으로 가네. 그리고 제법 만족스러워. 하지만 인상파 진영에는 깊은 황량함이 가득한 것 같네. 팍토루스 강은 더 이상 그들 편에 흐르지 않고, 작품들은 그 자리에서 말라가지. 우린 매우 험난한 시대를 살고 있어. 과연 저 불행한 회화가 언제 다시 광명을 되찾을지 모르겠네."
그럼에도 세잔은 편지 말미에 "햇살 가득한 해변에서 돌아오면 곧 자네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라고 적어, 친구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드러냈다. 1878년 9월 14일 레스타크에서 보낸 편지에서는 "그는 내가 자네를 자주 만나는지 물었지. 그래서 나는 가끔 만난다고 답했고—자네가 내게 편지하는지도 묻기에, 최근에도 받았다고 했지. 그러자 그는 매우 놀란 눈치더군. 그렇게 나는 단숨에 그의 존경을 받게 됐어"라며, 졸라와의 우정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자부심이었는지를 보여줬다.
세잔과 졸라의 일부 서신은 국내에 부분적으로 소개된 바 있으나 현존하는 편지를 연대순으로 총망라해 완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은 프랑스 현대 지성사를 이끈 갈리마르 출판사의 대표 문학비평 시리즈인 '블랑슈 컬렉션(La Blanche)'을 번역 대본으로 삼아 편지 원문 전체를 온전히 번역하는 데 중점을 뒀다.
두 사람의 문장과 편지가 서로 응답하며 교차하는 편집 방식은 마치 그들이 함께 직조해 나가는 한 편의 거대한 캔버스 회화와 장편소설을 보는 듯한 인상과 감동을 선사한다. 아카데미즘의 권위와 전통에 저항하며 새로운 회화와 문학을 실험하며 동행했던 두 예술가의 우정과 삶이 고스란히 담긴 편지들은 둘의 인간적 초상과 예술관뿐 아니라 19세기 프랑스 예술사의 결정적 전환점을 증언하는 귀중한 기록이다.
책은 2013년 새롭게 발견된 세잔의 마지막 편지를 수록해 더욱 주목받는다. 1887년 11월 28일 자로 된 이 편지에서 세잔은 여느 때처럼 "나의 친애하는 에밀(...) 곧 악수를 건네기 위해 보러 가겠네"라며 졸라가 신간을 보내준 것에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한다.
이 발견은 문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1886년 졸라의 소설 '작품' 속 자살한 비운의 천재 화가 '클로드 랑티에'가 세잔을 모델로 했다고 여긴 세잔이 분노해 절교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이 마지막 편지는 '작품' 출간 이후에도 그들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미테랑은 "메당에서의 나날 이후 그들의 우정은 멈추지 않았다. 세잔은 편지를 주고받았던 그 누구에게도 졸라에게만큼 내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그의 가족에게만큼 호의를 보인 적이 없다"고 평가했다.
옮긴이 나일민은 이 편지들의 문학적 가치에 대해 다음과 깊이 있는 해석을 제시했다.
"삶과 시대의 다양한 굴절에도 지속되고 교차된 편지들은, 작가이기 이전 한 인간으로서 그들의 평범하고 사적인 일상과 관계, 심리의 풍경을 그려 보인다. 떠나간 친구와 떠나온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담은 글들, 재능과 진로를 확신하지 못하는 서로를 격려하며 작품의 탄생을 예비하는 모습, 취향과 감각이 자본화되는 근대 대도시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타자 경험과 연애와 인간관계로 인한 감정의 무게가 담긴 글들, 나아가 당대의 주요 예술과 정치 사안에 대한 단상들은 그들의 내면 공간뿐 아니라 혁명과 반동으로 점철된 19세기 프랑스라는 외부 공간까지 넘나들게 한다."
편집자 미테랑은 이 특별한 관계의 본질을 몽테뉴의 유명한 문장을 빌려 설명한다. "세잔과 졸라, 우리는 왜 이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들만 따로 모은 책을 출판할 만큼 이들의 하나 된 관계에 주목했을까? 그들이 남긴 편지 일반은 분명 대중이 공공 도서관에서 접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몽테뉴의 표현을 빌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잔이었고, 그리고 졸라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둘 같은 소설가와 화가 간의 정신적, 미학적 연합에 필적할 만한 우정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세잔과 졸라는 작품의 주제와 개념, 그리고 표현법에서 현대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연관성이 있으며, 같은 고향 출신에다 사회적 계급과 교육 수준까지 비슷했다. 게다가 같은 예술가 무리에 속했고, 아카데미즘을 거부하며 같은 대상과 세계의 형태에 관심을 보였다는 점, 그리고 규범과 관습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 했다는 점에서도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교차된 편지들 1858-1887'은 단순한 서신집을 넘어 인류 역사의 변혁기였던 19세기 프랑스에서 예술가들이 실제 무엇을 보고 듣고, 어떤 일상을 살아갔는지 생생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서양 근대 예술과 문화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또한 1870년대 이후 프랑스 모더니즘 예술의 등장과 전개 과정에서, 세잔과 졸라의 우정처럼 사적이면서도 위대한, 다양한 예술적 연대와 공동체의 존재를 상상하게 만든다.
세잔과 졸라의 예술적 업적은 단순히 개인의 창작에 그치지 않았다. 세잔은 회화의 전통적 관점을 해체하고, 색과 형태의 새로운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현대 미술의 문을 열었다. 그의 작품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각적 경험의 본질을 탐구하며 예술의 철학적 깊이를 더했다. 졸라는 문학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며, 예술이 단순한 미적 즐거움을 넘어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힘임을 보여줬다. 두 예술가는 각자의 분야에서 혁신을 이루며, 19세기 예술사의 전환점을 만들어낸 거장으로 자리 잡았다.
나일민 옮긴이는 후기에서 "긴 시간, 한결같은 예의와 호의로 소통하는 두 거장의 편지들은(...) 이들이 굳건히 자신과 서로를 지키며 기품 있게 동행했음을 드러내 보이는 어떤 강력한 증언이기도 하다. 또한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두 예술가의 기다림과 수행의 시간, 즉 삶과 영혼의 교감으로 빚어진 아름다운 텍스트들이다"라고 평했다.
앙리 미테랑은 프랑스 욘 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하고, 언어학자 로베르 레옹 바그너의 지도로 1959년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브장송과 낭시, 랭스 대학교를 거쳐 파리 제8대학교와 제3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990년 정년퇴임 후에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2004년까지 종신교수로 활동했다. 평생을 에밀 졸라 연구에 헌신한 그는 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이아드판' '루공-마카르 총서' 5권을 비롯해 15권의 졸라 전집과 연대기 순으로 편찬한 21권의 전집을 기획·편집했다. 2021년 타계 직전까지도 집필을 멈추지 않고 졸라의 삶에서 '아버지의 죽음'의 의미를 다룬 유작을 남긴 그는 문학을 통해 역사와 예술을 성찰하고 현실과 시대정신을 사유하는 지성을 평생 실천한 학자였다.
번역자 나일민은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제1대학교에서 미술사 학사·석사와 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에서 예술작품의 역사와 맥락, 의미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하고 있다. 자신만의 고유한 길을 가는 작가들의 언어와 삶, 예술적 실천을 조명하는 글을 쓰고 번역하며 예술과 함께하는 공간문화 기획에도 참여하고 있다.
세잔 탄생 200주년을 맞는 2025년, 200년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지금 여기에서 다시 만나는 세잔과 졸라의 대화는 서로 달랐기에, 또 함께였기에 더욱 빛났던 그들의 우정과 예술, 삶의 의미를 새롭게 성찰하게 만드는 귀중한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