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들마저 경악... 지구상에서 가장 경이롭고 기묘한 포유류의 정체
2025-08-09 20:21
add remove print link
암에도 안 걸리고 통증도 못 느껴... 산소 없이 18분 버텨
소형인데 37년 이상 살아... 인간으로 치면 800년 사는 셈
병으로 죽거나 늙어서 죽기보단 대부분 천적 때문에 죽어

벌거숭이두더지쥐.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털 없는 몸뚱이, 뻐드렁니, 지하 굴에서 벌떼처럼 우글대는 삶. 이 작은 생명체는 포유류의 상식을 뒤엎는다. 동아프리카의 건조한 땅속에서 이 녀석은 생물학의 법칙을 비웃으며 30년 넘게 건강하게 살아간다. 암? 거의 안 걸린다. 통증? 못 느낀다. 산소 없는 환경에서도 18분이나 버틴다. 기묘한 동물 벌거숭이두더지쥐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벌거숭이두더지쥐는 겉모습부터 특이하다. 몸길이 8~10cm, 무게 30~35g. 여왕 개체는 80g까지 나간다. 털은 거의 없고, 분홍빛 피부는 쭈글쭈글하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진은 벌거숭이두더지쥐 모습에 대해 “크고 튀어나온 이빨을 가진 길쭉한 칵테일 소시지”라고 묘사했다. 두더지라 불리지만, 사실 설치류다. 두더지와 혈연은 전혀 없다.
벌거숭이두더지쥐는 동아프리카 열대 사바나, 주로 에티오피아 남부, 케냐, 소말리아의 건조한 지역에 산다. 20~300마리가 무리를 이뤄 지하 굴에서 함께 산다. 평균 무리 규모는 75~80마리.
이들의 사회 구조는 포유류라기엔 너무 낯설다. 한 마리의 여왕이 무리를 지배하고, 병정과 일꾼으로 나뉜 계급 체계는 오히려 곤충인 개미나 벌을 연상시킨다.
여왕은 일꾼들보다 훨씬 오래 산다. 30년 이상. 새끼를 낳아 무리를 유지하며, 자신의 아들 중 가장 건강한 수컷과 교미한다. 이 수컷은 교미만 하다 단명한다. 여왕은 또 다른 건강한 아들과 교미를 반복한다. 이런 생태 탓에 유전자 풀이 좁다. 하지만 외부 수컷을 끌어들이려 노력한다. 다른 무리의 여왕과 교배를 시도하는 이들은 무리의 유전 다양성을 늘린다.
무리의 암컷들은 번식 능력이 있다. 하지만 여왕의 절대 권력 앞에서 스스로 호르몬을 조절해 불임 상태가 된다. 여왕은 번식 호르몬을 분비하는 암컷을 감지하면 가혹하게 처벌한다. 여왕이 죽으면 암컷들은 여왕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이런 극단적 사회성을 보이는 포유류는 벌거숭이두더지쥐를 제외하면 다마랄랜드두더지쥐만 보인다.
먹이는 주로 대형 식물의 뿌리줄기다. 가끔 자기 배설물이나 동료의 배설물을 먹는다. 천적은 뱀, 벌꿀오소리, 맹금류. 천적이 나타나면 병정들이 굴 입구로 달려가 뻐드렁니로 필사적으로 싸운다.
벌거숭이두더지쥐의 생물학적 특징은 더 기묘하다. 캡사이신이나 산에 의한 통증을 못 느낀다. 독일 막스-델브뤽 분자의학센터 연구진에 따르면 통증 신호를 전달하는 ‘TrkA’ 단백질의 아미노산 변형 때문이라고 한다. 지하 환경은 이산화탄소 밀도가 높아 산이 축적되기 쉽다. 통증에 둔감한 건 생존에 유리하다. 연구진은 “여러 마리가 붙어 사는 열악한 환경에서 통증을 못 느끼는 게 오히려 나았다”고 설명한다.
암 내성도 놀랍다. 일반 설치류는 암 발생률이 높아 실험동물로 쓰이지만 벌거숭이두더지쥐는 암에 거의 걸리지 않는다. 2013년 미국 로체스터대와 이스라엘 하이파대 연구진은 특이한 히알루론산이 세포 변형을 막고 암세포 증식을 억제한다고 밝혔다. 이 히알루론산은 세포를 단단히 붙잡아 암이 퍼지는 걸 막는다.
산소 없는 환경에서도 버틴다. CO2 농도 80%에서도 생존하고, 산소 5% 이하 환경에서도 1시간 이상 산다. 산소가 완전히 없어도 18분을 견딘다. 산소 부족 땐 신진대사량이 줄어들고 호흡이 억제된다. 체내 과당과 설탕 농도가 높아 포도당 대신 과당을 통한 무산소호흡으로 세포호흡을 유지한다. 젖산에 의한 산증도 조직 손상 없이 버틴다. 이 메커니즘은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수명도 경이롭다. 소형 동물인데 37년 이상 산다. 인간으로 치면 800년을 사는 셈이라고 한다. 햄스터나 쥐의 수명이 2~3년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나다. 곰퍼츠의 사망률 법칙, 즉 나이 들수록 사망률이 높아진다는 생물학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세 살과 30살 된 벌거숭이두더지쥐의 외모는 거의 구분이 안 된다. 건강하게 늙는다. 병으로 죽는 경우는 드물고, 주로 천적의 공격으로 죽는다.
번식 능력도 독특하다. 미국 피츠버그의대 미구엘 브리뇨-엔리케스 교수 연구팀은 2025년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발표한 논문에서 여왕 벌거숭이두더지쥐의 비밀을 밝혔다. 인간이나 생쥐는 태어날 때 한정된 난자를 갖지만 이들은 다르다. 태어난 지 8일 된 암컷은 평균 150만 개의 난자를 갖는다. 생쥐보다 95배 많다. 놀랍게도 출생 후에도 난자를 생성한다. 생후 3개월, 심지어 열 살 된 개체에서도 난자전구세포가 분열한다. 평생 난자를 만들어낸다. 여왕이 된 암컷은 번식 활동이 활성화된다. 여왕이 죽거나 제거되면 다른 암컷이 경쟁해 여왕이 된다. 새 여왕의 난자전구세포는 분열을 시작한다. 이 발견은 “포유류는 출생 전 한정된 난자를 갖는다”는 70년간의 정설을 뒤엎었다.
벌거숭이두더지쥐 특성은 인간 의학에 시사점을 준다. 인간은 나이 들며 번식력이 떨어지고, 폐경기가 온다. 하지만 벌거숭이두더지쥐는 평생 번식한다. 연구진은 이 시스템을 연구해 인간의 난소 기능을 보호하고 생식력을 연장하는 방법을 찾길 희망한다. 난소 건강은 암 위험, 심장 건강, 수명에도 영향을 미친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벌거숭이 두더지쥐 이니셔티브’는 벌거숭이두더지쥐를 활용해 관절염, 암, 염증성 질환 치료를 연구한다. 연구진의 한 교수는 “벌거숭이두더지쥐가 노화 관련 질병을 겪지 않는 이유를 알면 인간과 반려동물의 질병 치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벌거숭이두더지쥐는 산에 둔감한 유전적 변이를 갖는다. 지하 굴의 높은 이산화탄소는 탄산을 만든다. 하지만 유전 변이로 산에 면역이 생겨 고통 없이 지낸다. 이 특성은 염증성 통증 치료 연구에 활용된다.
대중매체에서도 벌거숭이두더지쥐는 인기가 있다. 애니메이션 ‘킴 파서블’의 루퍼스는 벌거숭이두더지쥐 애완동물이다. 털 알레르기가 있는 주인공이 선택한 동물. ‘모여라! 시튼 학원’의 하다노 미키는 여왕처럼 군림하며 노출 개그를 담당한다. ‘BNA’의 바르바레이 로제는 대머리 수인 캐릭터다. 게임 ‘폴아웃’ 시리즈의 두더지쥐는 생물병기로 개조된 버전.
노화와 암을 피하는 비밀, 벌 떼 같은 사회성, 통증에 둔감한 신체. 벌거숭이두더지쥐는 생물학의 경계를 허문다. 과학자들은 이 작은 생명체에서 인간의 건강과 장수의 열쇠를 찾고 있다. 한국에선 에버랜드 로스트 밸리와 서울동물원 야행동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